되돌아본 기자생활 40년 기자생활을 돌아보며 나경택 전 연합뉴스 광주ㆍ전남지사장 후배 기자가 전화를 해왔다. 기자협회보에 싣겠다며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기자생활을 돌아보는 글을 부탁한다고 했다. 무조건 '오케이'란 답을 보내고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고 말이다.만 40년의 기자생활을 마무리하고 광주지역 어르신들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2년 이상 구당 선생의 뜸과 침을 공부했다. 침뜸요법사 시험도 합격했다.그러다 3년 전인 2010년 2월에, 4월 개원하는 빛고을노인복지재단 효령노인복지타운에서 일하게 됐다. 그 해 6월에는 빛고을노인건강타운으로 자리를 옮겨와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이 곳은 광주지역 60세 이상 인구 20만8000여 명의 26%인 5만4000여 명이 회원으로 등록해 이용하는 곳이다.최근의 설문 조사 결과 이곳을 이용하는 83%의 어르신들이 자신이 더 젊어졌음을 느낀다고 했다. 그만큼 어르신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곳이 바로 빛고을 노인건강타운이다.이곳에서 기자 시절 익힌 기술과 예절 등으로 어르신들의 건강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러면서 순간순간 사진기자로 활동하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질 때가 많다. 은퇴 후 제2의 삶을 사시는 어르신들과 나 자신을 보면 세월이 너무나 빠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역사의 증인으로, 사진기자로 보낸 40년1967년 2월6일 당시 전남매일신문사 사진기자로 입사해 2007년 2월28일 연합뉴스 광주ㆍ전남지사장을 마지막으로 40년 동안 문자 그대로 물불 가림 없이 현장을 지켜온 세월이 스스로 믿기지 않는다.격동기였던 한국 현대사의 한 복판에서 역사의 증언자로 40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고 보람이었다.1960년대 막 산업화의 길로 들어선 우리나라는 70년대 들어 산업화라는 명제 아래 사회가 재편되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모두들 도시로 향하면서 농촌의 변모가 급격했고 산업화와 더불어 민주화 요구도 급물살을 탔다. 그 와중에서 1980년 5월, 잊을 수 없는 5ㆍ18광주민중항쟁이 발발, 긴 사진기자 생활에서 가장 아프고 쓰라린 그리고 절절한 취재 기록을 남기게 됐다.1980년 당시의 광주는 강제로 지워진 이름이나 마찬가지였다. 광주ㆍ전남지역을 담당하는 사진기자로서 광주의 아픔을 기록했고, 광주의 이름으로 진행된 우리 시대의 민주화과정을 지켜봤다. 5ㆍ18항쟁기간동안 성당 등에서 잠을 자고 배고픔을 참아가며 건물에 숨어 한 컷 한 컷을 기록해나갔다. 당시에 광주지역 신문사 2곳은 문을 닫아야 했으며 많은 기자들이 광주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지금 당장 보도하지 못한다 해도 언젠가는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말겠다'는 사명감으로 물불 가리지 않고 기록해가며 외신에 제공해 마침내 외국에 광주의 진실을 보도하게 됐다.이같이 기록한 사진물이 광주의 진실을 밝히는데 한몫을 했으며, 1990년대 들어 당시의 기록들이 공개되고 재평가되면서 광주가 '부활'하는 역사의 질곡을 건너왔다.이렇게 죽음을 무릅쓰고 기록한 5ㆍ18항쟁 필름 등이 2년 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드디어 80년 5월 당시 '폭도'로 불렸던 광주시민의 민주화운동이 세계가 인정하는 '민중항쟁'으로 공인받게 된 것이다.사진은 그 때 그 현장을 가감 없이 보여주기 때문에 사실성과 역사성을 높이 평가받는다.사진기자는 펜 대신 카메라로 역사를 증언하고 기록하는 사관(史官)인 셈이다. 그래서 항상 깨어 있으려 노력했고 어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하려 애써왔다고 자부한다.오랜 기자 생활에 여러 번 상을 받았지만 그중에서도 인상적인 것은 1990년에 수상한 '용기 있는 기자상'이었다. 5ㆍ18광주민중항쟁 제10주년 기념 미사때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로부터 받은 상이다. 1987년 전두환 정부때 광주항쟁이라는 말조차 금기시되던 공포의 시절, 정평위가 제공자 이름은 밝히지 않은 채 광주항쟁 당시 사진을 기습적으로 사진집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란 책으로 발간하고 전시회도 열었는데 그때 내가 촬영한 많은 사진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당시에 광주항쟁 사진을 내어놓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용기 있는 기자상'을 받은 그 해에 한국기자협회가 수여한 '한국기자상(사진보도 부문)' 또한 큰 영광이었다. 이 상은 89년도에 광주ㆍ전남지역을 강타한 수재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해 전국 각 신문의 지면을 장식했다는 공로로 받았다.1981년부터는 연합통신(현 연합뉴스)에 몸 담아 일해 왔기 때문에 광주ㆍ전남지역에서 본인이 취재하는 뉴스는 전국의 각 일간지에 배포되던 시절, 하루 400㎜가 쏟아지는 집중호우로 접근조차 불가능한 상황에서 목숨 걸고 취재한 덕분이었다.이러한 것들을 가만히 돌이켜보면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일보다 스스로에게 좀 더 대견한 것은 직업에 대한 자긍심이 높아 오직 그것에만 매진했다는 점이다.지나간 순간은 다시 불러올 수 없다. 사진기자가 꼭 그 때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다. 사건사고가 예고를 해주고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자는 촉각이 예민해야 하고 판단력은 정확해야 하며 행동 또한 민첩해야 중요한 현장을 놓치지 않는다.언론계 대선배인 송건호 선생은 "기자는 냉철한 이마와 따뜻한 가슴을 동시에 갖고 있어야 한다"고 후배기자들에게 틈 있을 때마다 말하곤 했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차가울 정도로 이성적 판단을 지키되, 가슴 깊이 간직해야 '기자다운 기자'가 된다는 가르침이었다.거미도 거미줄을 쳐야 먹잇감을 구한다고 했다. 항상 현장을 지키고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후배기자들이 될 것을 당부한다. 이 세상에는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 있으나마나 한 사람, 꼭 있어야 하는 사람 등 이렇게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중국 속담에 '기러기는 날아가면서 울음소리를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좋은 명성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사람에게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속담이다. 신문 기사와 사진 설명에는 기자의 이름이 붙는다. 기자는 힘들긴 해도 좋은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최고의 환경에 있다.우리 지역민들이 더욱 편하고 바르며 즐거운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기자들이 되기를 바라며, 하느님의 은총 속에 평화와 행복이 가득하길 빈다.
광주전남기자협회 13-03-19 조회5207
나로호 취재 오더를 받고 한동안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사진기자 POOL로 취재에 임해야 하는 압박감과 한정된 공간에서 다른 기자들과 다른 사진을 만들어 내야 하는 부담감에 그 좋아하는 술자리도 마다했을 정도였습니다. 처음 머릿속에 그려진 사진은 팩트에 충실한 나로호 발사장면이었지만 두 번의 발사 연기에 준비 시간은 늘었고 내가 생각했던 그림같은 사진을 만들기 위한 시간 또한 벌었습니다.마지막 발사, 한국형 발사체의 첫 성공, 환희의 순간 등을 로켓이라는 무생물에 투영시킬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하던 중, 로켓이 1자로 날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그래! 나로호의 발사를 궤적으로 만들어보자! 그동안 준비해온 나로호의 긴 시간만큼 궤적으로 나로호의 성공을 알려보자!'이렇게 기획을 하자 또다시 찾아오는 불면의 시간. 기술적인 문제점부터 해결해야 하기에 취재시간 이외에 카메라를 가지고 노는(?) 시간 또한 늘었습니다. 저녁에 아파트 놀이터에서 불꽃놀이 용품을 사다 로켓이라 생각하고 테스트를 거치고 인도, 일본, 미국 등의 로켓 발사장면을 유튜브에서 다운받아 발사시간을 체크하고, 볼펜을 높이 던져 떨어지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프로그램을 돌려보기도 했습니다. 장비, 렌즈는 물론 CF카드에 저장되는 시간과 버퍼링 타임까지 계산해야 했고 나로호 발사 후 회피기동 시간까지 계산하느라 한동안 수학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변수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 성공 확률을 높인다고 했던가요? 그 변수를 줄이기 위해 CF카드를 여러개 구입해 테스트를 했다.-이제서야 밝히지만 비싸고 저장속도가 빠른 CF카드는 후보에서 탈락했다. 회피 기동 후 나로호가 본체를 틀때 연사가 계속 이뤄지면 안되고 버퍼링이 걸려야 했기 때문이다.-그 결과는 나름 만족스러웠습니다. 마침내 D-day인 2013년 1월30일 아침. 그 전날까지 새로운 사진을 만들기 위해 준비해온 프로그램들을 정비하느라 새벽까지 잠을 자지 못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시 향한 발사통제동 옥상. 1, 2차 발사때 사용했던 많은 장비가 아닌 내가 잘 쓸 수 있는 단 두 대의 장비로 결정을 보겠노라 다짐했고, 수도 없이 머릿속으로 그리고, 실제로 촬영해 테스트한 데이터가 있어 이제는 즐기는 마음으로 취재에 임할 수 있었다. 발사시간인 오후 4시. 쿵 하는 육중한 소리가 먼저 들리고 이어지는 연기와 솟구치는 불꽃. 그렇게 나로호는 내 눈앞에서 우주를 향해 날았고 3차에 두 번이나 연기돼 오기만 남은 나의 나로호 취재도 끝을 맺었습니다. 129컷을 한 장으로 모은 사진을 마감하고 고흥을 벗어나는 순간, 좀 더 잘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아쉬움이 더 진하게 남았습니다.--------------------------------------------------------------------------------------------------------- 김애리 광주매일 사진부 기자는 지난 1월30일 우리나라 최초 우주 발사체인 나로호의 발사 순간부터 우주로 올라가는 장면을 취재한 '우주강국 향한 꿈의 궤적'으로 한국기자협회가 선정한 이달의 기자상과 올해로 8회째를 맞는 '박경완 기자상'을 수상했다.
광주전남기자협회 13-03-19 조회8690 댓글3
며칠 전 고교졸업 50주년 모임을 가졌다. 오월 신록 속에 부부동반으로 다산초당, 왕인공원, 영랑생가 등을 돌며 1박2일 남도여행을 했다. 몇 번 가본 곳들이지만 볼수록 더 새롭다. 서울서 온 친구들은 버스 두 대, 광주 친구들은 버스 한 대에 탔다. 고향인 전라도보다 타향인 서울에 생활터전을 잡은 친구들이 두 배나 됐다. 오랜만에 날 새며 얘기를 나눴다. 신변잡담부터 세상살이까지 이야기가 번졌다. 다들 이젠 현역에서 떠난 '왕년에…' 수준이라 과장되기는 할망정 시비꺼리는 되지 않는다. 수십 년 관(官)을 상대로 사업을 한 어느 친구는 중앙관서를 드나들며 느꼈던 분위기를 우스개 섞어 털어놓았다. 'YS시절엔 남의 집에 가서 밥 얻어먹듯, 눈치 보며 지역 연줄 찾아 말소리도 소곤소곤 했는데, DJ때는 마치 내 집에 들어 온 듯, 전라도 사투리가 들릴 정도로 목소리가 커졌다. 참여정부가 들어서자 남도 목소리가 줄어들더니 MB시절에는 아예 힘을 잃었다.' 전라도 출신으로 서울에서 돈벌이를 하다 보니 지역차별이 정말 실감났을 거다. 어찌 돈벌이 뿐이겠는가. 권력서열에는 더 큰 차별이 있다. 너도 나도 말이 길어졌다. 지역발전이든 권력쟁취든 남도가 차별받고 뒤쳐진 이유는 무얼까. '뛰어난 지역인재가 없다. 예전처럼 개천이나 둠벙에서 용이 나오는 시대는 지났다.' 세태를 탓하던 한 친구가 "언론이 문제다."라고 말머리를 바꾸었다. 언론이야 약방에 감초처럼 두들겨 맞는 자리에도 빠지지 않지만 '사람 못 키우는 것도 언론 책임이라니?'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리에 언론계출신은 나뿐이었다. 일부 권력층이 잘못을 저질러놓고 사회의 지탄을 받게 되면 '언론잘못'이라고 둘러 붙이곤 하는데 거기에서 배웠나. "얼굴이 못생긴 사람이 거울을 쳐다보면서 자기 얼굴 못난 것은 생각 않고 '거울이 잘못되었다'고 성질내면 되겠나?" 거울 얘기로 얼버무리며 넘겼으나 속은 후련치 않았다. 우리 언론은 과연 거울 역할을 잘 하고 있나! '못난 얼굴은 못나게, 잘난 얼굴은 잘나게' 얼굴들을 생긴 그대로 잘 비춰주고 있나! 국민 혈세를 빼내먹는 도둑들을 찾아내 물어뜯고 쫓아내는 파수견 역할은 얼마나 했나! 어둔 밤 길 잃고 헤매는 서민들의 앞을 밝혀주는 횃불 역할은 잘 했나! 잘못된 길로 빠지지 말라고 소리치며 두드리는 목탁 역할은 했던가! 삼십년 기자생활을 한 나는 삼십년 동안 무얼 했나! '칼럼니스트'. 1971년, 기자 길로 나선 나의 목표였다. 세상살이를 보는 새로운 시각, 세상문제를 풀어가는 대안과 제언으로 독자들과 소통하고 독자들을 위로하고 독자들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하루살이 글쟁이가 아닌 '하루 역사가(歷史家)'로 살아남고 싶었다. 1983년 11월16일 첫 번째 칼럼을 썼다. 2001년 신문사를 떠난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지금도 열심히 쓰고 있다. 그렇게 많이 썼다면서 무엇을 이루었나. 누구를 감동시켰나. 무엇을 바로잡았나. 횃불 아니면 촛불이라도 밝힌 일이 있던가. 글 한 편 한 편이 하나의 돌이라면 돌탑이라도 쌓았을 터인데 남는 게 무어냐. 스크랩북 댓 권이 전부인가. "역사는 기록이나 유물만이 아니다. -마치 소화된 음식같이, 효과를 나타내는 신체운동같이 산 생명으로 존재 안에 남아 있어서 그 체격으로, 얼굴 생김으로, 마음씨 성격으로, 풍속신앙으로 되는 것이다." 함석헌 선생의 말씀을 새기며 자위한다. 나의 칼럼도 한 모금 물처럼 공기처럼 소화된 음식처럼 순간순간이나마 누군가의 존재 안에 생기를 불어 넣었으리라 믿는다. 광주에 '오월'이 왔다. 돌이켜 보니 한 가지는 기억난다. '분수대'를 지킨 일이다. 1988년 5월10일자 '분수대를 살리자'라는 칼럼이다. 광주일보 사회부장 때였다. 당시 전남도청 앞 분수대는 1980년 5월 민주항쟁의 대표적 상징이었다. 시민들이 민주를 절규하던 발언대였다. 피 흘리는 현장을 듣고 지켜본 증언대였다.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었던 그런 분수대를 털어내고 그 자리를 뻥 뚫어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자동차출입로로 만든다는 게 광주시의 계획이었다. "-예루살렘에 있는 통곡의 벽은 로마병정에 의해 파괴되다 남은 그냥 길이 300m의 하얀 돌벽일 뿐이다. 세계에서 관광객이 몰려들고 수많은 참배객들이 그 돌을 어루만지며 통곡을 하는 것은 돌벽의 겉모습 때문이 아니다. 돌벽이 지닌 역사의 숨결을 느껴보고 싶어서이다.-" 광주시는 사흘 후인 5월13일 '분수대를 원형대로 보존한다'고 발표했다. 돌탑은 못 쌓았어도 분수대를 허무는 것은 막은 셈이다. 살아난 분수대는 지금도 '오월'이 오면 분수대신 활화산같은 열기를 뿜어낸다. 뉴스는 기자가 써야 뉴스이다. 뉴스도 역사가가 쓰면 역사가 된다. 하루 역사를 하루하루 쌓아올리면 백년 역사가 된다. 숨 쉬듯 밥 먹듯 멈추지 말고 쓰자. 그래야 살아남는다.
광주전남기자협회 13-05-24 조회4944
존경하는 선배님, 그리고 사랑하는 후배들과 동료 여러분. 지금 저는 서울에서 간암이라는 고약한 녀석과 싸우고 있습니다. 이런 전쟁 아닌 전쟁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여러분들의 격려와 도움은 제게는 정말 큰 힘이 됐습니다. 당장 찾아뵐 수 없어 이렇게 지면으로나마 먼저 감사의 마음을 전하게 돼 죄송스럽습니다. 반드시 완치해서 건강한 모습으로 찾아뵙고 감사인사 올리겠습니다. 저는 지난 3월,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인해 병원을 찾았고, 검사 결과 간암과 갑상선암이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원인이 있으면 해결책도 있다는 생각으로 병원에서 권유하는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종양의 크기가 커서 재발 및 전이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크기를 줄이는 두 번의 색전술을 받았습니다. 간암이라는 게 재발과 전이 가능성이 높은 까다로운 암이라 수술적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의료진의 설명입니다. 그래서 우선 갑상선 제거수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후 간이식을 하자는 것이 의료진의 권유입니다. 시간적으로 이식까지는 조금의 여유가 있어 식이요법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최근 기자협회를 중심으로 모금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여러분들께 폐를 끼친 것 같아 죄송스런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미리 알았더라면 말렸을 것인데 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의 격려와 응원에 보답하는 길은 빠른 시일 내에 완쾌해서 다시 취재현장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비록 힘들고 어려운 길이겠지만 싸워서 반드시 이기겠습니다.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빠른 시일 내에 찾아뵐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년 5월 2일 윤한식 드림
광주전남기자협회 13-05-24 조회5140
구길용 광주전남기자협회장-취임사- 갑오년(甲午年).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있어 갑오년은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경장이 있었고 청일전쟁이 발발하기도 했습니다. 1954년, 다사다난했던 전후(戰後) 혼란기였습니다. 2014년, 올 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정세나 남북관계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이른바 ‘시계 제로’입니다. 국내 정치상황도 녹록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국가기관 대선개입 사태로 촉발된 여야간 대치정국이 하염없이 장기화되고 있습니다. 국가기관의 불법행위를 감싸고 도는 정부여당, 무기력한 대처로 일관하는 야당에게서 소시민들은 희망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대통령의 불통정치도 도를 더해 갑니다. 이런 와중에 4년마다 한번씩 치러지는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코 앞으로 다가와 있습니다. 호남지역내 민주당과 안철수 신당의 경쟁이 그 어느때 보다 뜨거울 것이라는 게 정치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스포츠계에서도 굵직한 행사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2014 소치동계올림픽, FIFA 브라질월드컵, 인천아시안게임 등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굴 메머드급 대회들이 잇따라 예정돼 있습니다. 지역적으로도 올 해는 2015년 KTX 호남선 개통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개관, 2015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개최를 앞둔 이른바 ‘징검다리 해’로 불립니다. 올 해를 어떻게 준비하고 내실을 기하느냐에 따라 ‘소외받은 땅’ 광주 전남이 중흥기를 맞을 수 있을지 여부가 갈릴 것입니다. 이런 격변의 시기 갑오년에 제39대 광주전남기자협회가 새롭게 출범한다는 것은 남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언론으로서 사명감도 크고 해야 할 일도 많습니다. 일부에서는 언론이 위기라고들 말합니다. 지방언론의 척박한 환경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희망은 언론입니다. 국가와 사회가 잘못갈 때 가슴 졸이며 두 눈 부릅뜨고 고민하는 이들이 바로 기자들입니다. 불의에 과감히 맞서고 소수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들이 또한 기자들입니다. 지역의 미래비전이 될 어젠다를 설정하느라 치열하게 토론하는 이들이 기자들입니다. 언론이 바로 서야 이 사회와 역사가 바로 갑니다. 조지 오웰은 이렇게 정의합니다. ‘저널리즘은 누군가 보도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을 보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누군가는 권력이 될 수도, 자본이 될 수도 있겠죠. 역으로 이렇게 정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널리즘은 누군가 보도되기 원하는 것을 보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누군가는 이 땅의 서민이고, 소수자고, 알권리를 가진 국민들이 될 것입니다. 이렇듯 언론은 엄중한 소명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제39대 광주전남기자협회는 이 같은 사명감을 바탕으로 지역사회에 조그만 정의의 주춧돌을 놓는 심정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것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의 속담처럼 560여 회원들과 함께 긴 호흡으로 나아 갈 것입니다. 언론이 희망입니다.
광주전남기자협회 14-02-19 조회3804
김기봉 지역언론발전 및 공정보도위원장 광주시장 출마 의사를 피력한 이용섭 의원이 최근 광주에는 지방권력에 우호적인 언론사 밖에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 의원이 광주지역 언론에 대한 불편함 심경을 토로한 것인지, 광주의 언론 환경을 질타한 것인지, 또는 광주언론에 대한 애정어린 충고를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발언의 배경을 떠나 국회의원이 광주 언론 상황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 씁쓸할 뿐이다. 광주지역 언론인들이 이 의원의 발언에 대한 비판과 불만을 쏟아내기 앞서 왜 그런 인식을 하게 됐는 지 곱씹어봐야 할 것 같다. 각 언론사들이 생존을 위해 언론의 역할을 저버리고 있는 지 성찰해봐야 한다. 광주ㆍ전남기자협회 지역언론발전 위원장으로서 건전한 언론발전 방안을 회원들과 고민하고 토론할 것이다. 특히 언론은 스스로 공정성을 무너뜨리면 존립의 근거를 잃게 된다. 그런 만큼 다가올 6ㆍ4 지방선거 기사의 객관성과 공정성 담보는 매우 중요하다. 회원사들이 개별 회사의 이해관계를 떠나 유권자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공정하고 객관적인 선거 기사 보도를 위해 함께 노력하는 장을 만들어야 한다.
광주전남기자협회 14-02-19 조회3763
박수인 대외협력위원장 ‘광주전남기자협회’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협회 연혁을 찾아보니 1964년에 창립됐다고 나와 있더군요. 제가 일하는 ‘광주MBC’가 1964년에 라디오 전파를 처음으로 송출했다고 하니까, ‘광주전남기자협회’와 ‘광주MBC’는 올해 함께 50번째 생일을 맞게 되는군요. 지난 50년은 우리나라가 산업화와 민주화의 기틀을 다지고, 그 과정에서 계급의 이해가 충돌하고 지역간 갈등이 심화됐던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격랑의 시대에 민중들은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떨쳐 일어났고, 숱한 역사의 변곡점에 광주는 항상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광주와 전남의 언론인들은 시대정신을 창출하고 선도해 왔던 광주시민들의 증인이자 동반자였습니다. 광주는 언제나 그랬듯이 올해도 중요한 선택들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지나온 50년의 역사를 부끄럼 없이 써왔듯이 이제 새로운 50년을 시작해야 하는 순간입니다. 광주와 전남의 언론인들도 새로운 역사를 써야하는 주체들 가운데 속해 있습니다. 책임 막중한 시기에 ‘광주전남기자협회’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은 저는 설레기도 두렵기도 합니다. 기자로서 부끄러운 제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요즘입니다.
광주전남기자협회 14-02-19 조회3764
박정욱 편집위원장 광주전남기자협회보 편집 책임을 맡게 됐다. 전문가들을 상대로 협회보를 만들려니 겁이 난다. 하지만 어쩌랴. 누군가는 해야 하고, 또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니 힘을 내본다. 편집위원은 각 지회에 1명씩 총 17명이다. 이들은 젊고 활달하다. 기자협회의 차기 동량들이다. 지난달 14일 첫 회의를 했다. 2월호 발간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결과물이 이 것이다. 아직 조잡하고 미진하다. 매달 조금씩 개선을 약속한다. 협회보는 기자들 세계를 다룬다. 알림이 역할을 넘어 다양한 공론장이 됐으면 한다. 기자들의 속사정을 들춰내 애환은 공감하고 고질병은 고쳤으면 한다. 또 취재원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이야기도 싣고자 한다. 기자와 취재원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지 않는가. 각 지자체․공공기관․기업 등 홍보 관계자들의 많은 참여 바란다.
광주전남기자협회 14-02-19 조회3654
장필수 수석부회장 기자라는 직업으로 살아온 지도 어느덧 21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한해도 쉬지 않고 취재현장을 뛰었습니다. 취재기자들은 출입처라는 이름으로 기관에 드나들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기사를 통해 일정부분 그 기관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어떤 기관의 잘못된 관행이랄지 복지제도를 보도함으로써 개선을 이끌어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정작 자신들의 직장에선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지회장을 지냈고 난생 처음으로 제38대 기자협회에서 집행부 일원으로 참여하기도 했지만 회원들의 요구에 흡족할 만한 성과로 보답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구길용 회장의 수석 부회장 제의에 몇 차례 고사하기도 했습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미력한 힘이라도 보태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집행부를 마지막으로 저도 취재현장을 떠날 것 같습니다. 취재현장에서 느꼈던 기자들의 열악한 복지문제 등을 개선하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집행부에 참여한 훌륭한 후배들은 물론 500여 기자들과도 회사를 떠나 교류를 넓히도록 하겠습니다. 제39대 기자협회가 순항하도록 조율하는 것이 소임이라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광주전남기자협회 14-02-19 조회35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