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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세미나] “미처 알지 못했던 제주 아픔 깊게 느꼈다”

작성자 : 광주전남기자협회 (118.40.67.***)

조회 : 1,049 / 등록일 : 22-05-26 16:42

제주 4·3 세미나

 

미처 알지 못했던 제주 아픔 깊게 느꼈다

4·3 유적지 돌아보며 마주한 역사

어렴풋 짐작했던 것보다 더 참담

이름 얻기도 전에 희생된 아이도

세미나 계기로 역사 공부 과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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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지난 3월31일부터 4월2일까지 제주 일원에서 제주4 3세미나가 진행됐다. 

 

 광주전남기자협회가 마련한 제주 4·3 세미나를 통해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제주의 아픔을 더 깊게 느껴 개인적으로 값진 시간이었다.

 실제로 제주4·3평화공원 위령탑을 올려다보며 스친 생소함과 낯섦에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광주에 살면서 5·18민주화운동 추모비는 수십 번 봤지만 4·3 위령탑은 그 형태조차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하기 전, 대학시절의 경험 하나를 공유하고 싶다. 세계의 전쟁사 강의를 수강하던 중, 한 베트남 학우가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라며 처참한 사진을 들고 온 일이다.

 그 순간 정말 한국군의 소행일까, 저 학우는 왜 저 사진을 발표했을까, 하는 식으로 수많은 물음표가 머릿속을 채웠다. 그중 가장 큰 것은 왜 나는 퐁니·퐁넛 마을 학살을 들어본 적조차 없을까하는 의문이고, 반성이었다. 모른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은 제주4·3평화공원과 북촌리 너븐숭이 마을을 둘러보는 순간순간 계속됐다.

 유적지를 통해 본 제주4·3은 어렴풋한 짐작으로 생각해왔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했다.

 제주4·3평화공원에 마련된 위패봉안실에는 군경의 총칼에 목숨을 잃었던 사람들의 이름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도 부족할 만큼 빼곡하게 붙어있었다.

 수많은 이름들 사이로 군데군데 강기중의 자’, ‘김석호의 차녀하는 긴 글자들이 눈에 띄었다. 이름 석 자를 얻기도 전에 목숨을 잃어야 했던 아이들의 위패였다.

 제주4·3평화기념관에는 아래턱이 없어지거나, 다리를 잘라낸 채로 일생을 살아야 했던 제주도민들의 사진이 수백 장은 붙어 있었다.

 유해 발굴 현장을 재현했다는 전시관에는 수십 명의 유해가 어느 부위의 뼈인지도 알기 힘들 만큼 뒤섞여 널브러져 있었다.

 제주4·3세미나를 마치기 전, 제주도에 대한 내 이미지는 평화로운 휴양지 혹은 즐거운 관광지 정도였다.

 23일의 일정을 보낸 이후에야 하얀 모래사장 옆에 떡하니 남아있는 일제군수창고를, 제주도 곳곳에 널려있는 4·3피해자 무덤을 알아갈 수 있었다.

 2년이라는 짧지만은 않은 기간 기자생활을 했지만 아직도 모르는 게 많구나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요즘이다. ‘광주 토박이라 자부하면서도 5·18민주화운동이 늘 어렵듯 말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공부할 수 있다는 점은 기자라는 직업의 대표적인 장점 중 하나가 아닌가.

 기자협회에서 마련한 제주세미나를 계기로 4·3 공부를 시작한 만큼, 그 공부를 이어가는 것은 나의 숙제라고 생각한다.

 남은 기자생활동안 수백 번쯤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가는 것이 내 과제이듯 말이다.

 

  무등일보 안혜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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