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다크투어] 75년 전 상흔 곳곳에… 언론인 역할 되새겨
조회 : 151 / 등록일 : 23-10-04 16:30
75년 전 상흔 곳곳에… 언론인 역할 되새겨
여수·구례 곳곳 슬픈 역사 간직
그 날의 고통 고스란히 느껴져
특별법 제정 후에도 과제 산적
“극심한 이념 대립이 남긴 상처, 명백히 진실 규명돼야”
광주전남기자협회 회원 20여 명은 지난달 31일부터 이달 1일까지 1박 2일간 여수시와 순천시, 구례군 등에서 ‘여순사건 다크투어’를 실시했다. 이번 여순사건 다크투어는 여수·순천 10·19 사건(여순사건)을 되짚고 진상규명과 향후 남은 과제 등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됐다.
여순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25년간 애쓰는 박종길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소장이 안내자로 나섰다.
이번 투어에서는 여수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정문에 있는 14연대 주둔지와 호명동 암매장지, 중앙초등학교 등 여순사건이 실제 발생한 곳을 방문해 관련 설명을 듣는 식으로 이뤄졌다.
흔히 관광지로 알려진 여수와 순천은 75년 전 극심한 이념 대립 끝에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 당한 역사의 현장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해당 지역의 지형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초등학교와 경찰서 등 대부분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우선 여수 중앙초등학교(구 종산국민학교)는 민간인이 끔찍하게 살해당한 곳이다. 이곳은 1948년 10월 28일 여순사건이 진압되자 여수경찰서 특수대와 국방경비대 군인들이 주둔한 곳이다.
이 중 부산의 5연대장이었던 김종원은 혐의자를 취조하는 과정에서 재판 없이 ‘즉결 처분’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을 자행했다.
특히 김종원은 본인의 실력을 보여준다며 민간인 여러 명의 목을 한 번에 베기도 했다고 한다.
다음으로 찾은 호명동 암매장지는 지난 1998년 박 소장이 직접 유골 발굴에 참여했던 곳이다. 호명동 암매장지에서 발굴된 유골을 통해 ‘여순사건’의 진실이 조금씩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곳은 국군에 의해 비 무장한 민간인들이 다수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등 진상규명 활동의 시발점이 됐다.
박 소장은 발굴 당시를 떠올리며 “갑작스레 비가 내렸지만 다행히 발굴은 수월했다”며 그날을 생생하게 설명했다.
수많은 꽃과 절경이 펼쳐진 구례군 산수유 사랑공원에도 여순사건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공원 중턱의 산동애가 시비가 이를 증명했다. 산동애가는 여순사건 때 구례군 산동면 상관마을에 사는 백부전(본명 순례)이라는 열아홉 살 처녀가 부역혐으로 끌려가면서 구슬프게 불렀던 노래로 알려졌다.
당시 부자였던 백씨 집안의 5남매 중 큰아들과 둘째 아들은 일제 징용과 여순사건으로 희생되고 셋째 아들마저 쫓기는 상황이었는데, 그 딸이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오빠 대신 끌려갔다고 한다.
열아홉 나이에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죽게 된 그 처녀가 끌려가면서 비통한 마음에 구슬프게 불렀던 노래 가사를 후에 주민들이 기억해 적혀진 것이 산동애가이다.
투어를 다니면서 느낀 점은 고향과 가까운 곳에서 무차별한 학살과 억울한 죽음, 그리고 극에 달한 이념 대립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여순 사건 발생지마다 관련 설명이 적혀있는 안내판은 더욱 현장에 있음을 실감케 했다.
그러나 여순사건에 대해 인지도는 상당히 낮은 편이다. 오히려 광주에서 발생한 5·18민주화운동에 비해 희생자 수와 피해 규모가 더욱 큰 데도 말이다.
그런데도 여순사건의 특별법은 불과 2년 전인 지난 2021년 제정됐고, 아직 밝혀지지 않거나 왜곡된 진실도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사회의 부조리를 들여다보고, 보다 더 나은 지역사회를 구축하고자 하는 지역 언론의 역할을 여순사건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민찬기 전남매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