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0년 5월 신군부의 부당한 언론검열에 과감히 맞서 제작거부를 결의했던 선배 언론인들의 의지는 한국 언론사에 큰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그들의 역할이 있다고 해서 5ㆍ18민주화운동의 상처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대다수 언론매체와 기자들이 5ㆍ18에 대한 침묵과 왜곡, 권력에 대한 찬양으로 일관해온 사실은 한국 언론의 부끄러운 역사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장을 뛰는 기자로서 언론의 자기반성적 접근이 앞서야 한다는 점을 제기한다. 5ㆍ18과 언론의 역할을 조명하는 좌표를 크게 두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는 5ㆍ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고 정신을 계승하는 데 언론이 어떤 역할을 해왔고 미래 어떻게 할 것인가이며, 또 하나는 5ㆍ18의 중요한 정신, 민주ㆍ인권의 척도가 될 언론의 자유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는 점이다. 첫번째 화두의 물음에 대한 답은 분명하다. 그 당시 언론들은 5월 광주의 진실 보도를 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왜곡 보도에 앞장섰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다. 5ㆍ18 정신계승과 관련해 민주ㆍ인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는 국제 언론감시단체인 '프리덤하우스'가 발표한 2013 언론자유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여전히 부분적 언론자유국이란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광주전남기자협회 13-05-24 조회4457
5ㆍ18민주화 운동 33주년을 맞아 한국사회를 되돌아 볼 때 80년대 민족민주운동의 출발점은 5ㆍ18민주화운동에서 비롯됐고 이 운동의 추진력은 유신체제를 승계하려는 신군부의 독재 체제를 무너뜨리는 성과도 이뤄냈다. 실제 5ㆍ18민주화운동은 1987년 6월 항쟁을 일으킨 실질적인 동력으로 작용해 민주화를 쟁취했고, 1992년 문민의 정부에 이어 1997년 국민의 정부로 민주적인 투표에 의한 평화적 정권 교체까지 이뤄냈다. 이로써 광주정신 계승을 자임한 진보세력의 집권은 민주ㆍ인권ㆍ평화가 사회적 의제가 된 계기를 마련했다. 광주정신의 기본모토가 된 민주ㆍ인권ㆍ평화는 부당한 공권력에는 저항권이 있다는 민주주의 기본 원리를 깨닫게 했고 멀게 만 느껴졌던 민주주의의 발전을 앞당기게 했다. 광주 정신인 민주ㆍ인권ㆍ평화가 언론에 의해 얼마나 구현됐는가를 살피기 위해 개념 정립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민주는 '부당한 권력에서 저항권이 있다는 것과 남이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키고 창조한다'는 기술에서 그 뜻이 확인된다. 즉 민주는 올바른 권력의 창출과 시민 권익의 실천이 자주적 과정을 통해 극대화되는 민주주의의 창조와 유지 속에 발현될 수 있다는 것으로 정의된다. 인권은 '5ㆍ18민주화운동은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한 시민저항으로 출발해 자치공동체의 형성 및 정의를 위한 자기희생과 반인륜적 학살에 저항하는 세계적 인권운동에서 발전하게 됐다'는 기술에서 그 의미가 확인된다. 평화는 '한국의 풀뿌리들은 1980년 광주를 통해 어느 한 계층에서만 외쳐왔던 민주ㆍ자주ㆍ인권ㆍ통일이라는 기치를 그들 가슴 내부에 자연스레 구호로 형성시켰다'는 표현에서 볼 수 있다. 정부 수립이후 광주 정신인 민주ㆍ인권ㆍ평화가 한국 언론에 의해 얼마나 보도되고 추구됐는지를 모색할 때 그 걸림돌에 부각되는 가장 큰 요인의 하나가 국가보안법이다. 국보법이 지배해온 지난 60여년 동안 양심과 자유, 민주주의가 처참하게 유린돼 왔기 때문이다. 보수정권은 국가보안법을 통해 진보언론의 활동 제약을 꾸준히 전개해 왔고, 이에 진보 언론은 자생하기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결국 지난 80년 보여준 민주, 인권, 평화의 광주정신은 국보법에 의해 훼손당하면서 언론 자유를 유린하는 이 법의 개폐가 시급한 실정이다. 여기에다 1960대 초 등장한 군부독재는 언론을 철저히 권력의 홍보기구로 전략시켰다. 박정희 장기 독재 집권은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전두환 철권통치 시대로 접어들지만 '광주'에서 촉발된 대학가와 시민사회의 민주화 요구와 항거로 1987년 6월 항쟁이 발생했다. 전두환 독재 시절에는 동아, 조선 투위와 80년 해직 언론인들이 저항매체인 '말'지 제작과 배포를 통해 제도언론이 보도하지 못한 진실 보도 역할을 담당했다. 또 노태우 시절 신문발행이 급증하게 되면서 한겨레신문이 국민주주 신문으로 등장해 언론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으며, 1997년 국민의 정부가 탄생하면서 민주화가 제도적으로 추진됐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족벌신문은 민중의 희생으로 확보된 민주화 공간 속에서 삐뚤어진 모습의 '언론자유'를 주장하며 저항했고 그런 모습은 참여정부 시절에도 지속됐다. 참여정부는 집권 초 6ㆍ15공동선언으로 조성된 남북 화해 기류를 이어가지 못했고 노무현 정권 말기인 2007년에 남북이 10ㆍ4선언에 합의했지만 그것이 실천되지 못한 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다. 이 정권은 과거 정부의 남북 합의를 철저히 외면하면서 미국과 함께 대북 군사적 압박을 강행했고 결국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데 이어 박근혜 정권 들어 개성공단도 실질적으로 폐쇄되기에 이른다. 사상의 자유를 탄압하면서 언론 자유를 유린하는 국가보안법의 개폐는 시급히 이뤄져야 하고 언론 산업이 전체 사회가 균형 발전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에 평화와 안전이 정착되기 위해서는 광주정신이 그 원동력이 돼야 하고 그 정신의 확산에 언론이 적극 기여하도록 다각적인 노력이 전개돼야 한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신군부의 광주 폭거에 항의해 벌인 언론 투쟁이 아직까지 '광주'의 일부로 포함되지 못하고 있는 현상은 역사 바로 잡기 차원에서 개선돼야 한다.
광주전남기자협회 13-05-24 조회4622
1980년 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의 광주 폭거에 항의한 언론투쟁을 '광주의 역사'에 포함시켜야 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국기자협회가 주최하고 광주ㆍ전남기자협회 주관으로 20일 광주 YMCA 무진관에서 열린 5ㆍ18 민주화운동 33주년 기자의 날 기념 토론회에서 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는 '5ㆍ18 민주화운동 33주년과 한국언론의 좌표'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80년대 민족민주운동 발전의 출발점은 5ㆍ18민주화운동에서 비롯됐고 그 추동력은 지금도 여전히 뜨겁고 강력하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고 대표는 이어 "30년이 지난 지금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에 평화와 안전이 정착되기 위해서는 광주정신이 원동력이 돼야 하고 그 정신의 확산에 언론이 적극 기여하도록 다각적인 노력이 전개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국언론 어디로 가고 있나'라는 주제로 진행되는 이날 토론회는 고 대표의 주제발표에 이어 윤장현 아시아인권위원회 이사의 사회로 전ㆍ현직기자, 교수 등 4명이 토론자로 나서 열띤 토론을 가졌다. 토론자로는 손정연 전 전남일보 편집국장, 조정관 전남대 정외과 교수, 구길용 광주ㆍ전남기자협회 수석부회장, 김덕모 호남대 신방과 교수가 참여했다. 조정관 전남대 교수는 "5ㆍ18의 범위는 80년 5월18~27일 광주에 국한돼서는 안된다"며 "5ㆍ18을 바르게 보도하고자 전국적으로 싸우고 희생된 언론의 노력은 목포 및 다른 전남지역에서의 투쟁과 더불어 5ㆍ18을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 포함되는 것이 정당하다”고 강조했다. 정영팔 광주ㆍ전남기자협회장은 "민주ㆍ인권ㆍ평화를 지향하는 오월정신이 우리 언론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언론자유를 위해 온 몸으로 저항했던 선배 언론인들의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이번 토론회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한편 광주시와 5ㆍ18기념재단이 후원한 이날 토론회는 강운태 광주시장과 오재일 5ㆍ18기념재단 이사장, 전ㆍ현직 언론인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서울지역에서 온 해직기자 30여명은 담양지역에서 1박을 한 후 21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ㆍ18민주묘지를 참배하고 상경할 예정이다.
광주전남기자협회 13-05-24 조회4512
"정말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는 반가움? 하지만 세월이 쌓은 '애증'도 만만치 않았죠."11년 만에 친정으로 돌아온 광주일보 박성천(44) 기자는 짧은 소회를 먼저 던졌다. 지난 2002년 월간지 '예향'이 휴간되면서 회사를 떠났던 그는 올해 4월호로 복간되는 '예향'을 발판삼아 지난 1월 광주일보의 문을 다시 두드렸다. 낯익은 선배와 낯선 후배 사이에서 항상 웃었지만, '애증'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만큼 지난 세월의 '외출'이 야속했다고 했다.지난 1994년 광주일보 편집부로 입사했던 그는 줄곧 '글쓰기'에 관심을 보였다. 광주일보 현직 기자로 지난 2000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서 단편소설 '무지리의 새'로 당선, 등단했다. 타사 신춘문예로 글쓰기의 소질을 보인 그는 편집부에서 '월간 예향부'로 옮겼고, 펜을 잡았다. 전남대 영문과 재학시절 용봉문학상과, 오월문학상을 수상하며 인정받은 필력은 예향에서 꽃을 피웠다. 그것도 잠시, 예향이 숨 고르기에 들어가자 설 자리는 사라졌다."30대 중반에 회사를 그만두니 막막했죠. 내 미래와 진로가 불안했고…. 가장 자신있는 것을 선택해야 했고, 글쓰기는 밥벌이로 이어졌죠."그는 광주대 문예창작과에서 문순태 교수의 지도로 소설에 대한 열정을 이어가며 석사를 취득했다. 단순한 글쓰기보다 학문으로서 글에 대한 탐구가 이어졌고, 전남대 국문과에서 2008년 '문순태 소설의 서사구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생계가 중요한 상황에서 학위가 필요했다"고 설명한 그는 지난 2011년 첫 소설집 '메스를 드는 시간'과 기행집 '강 같은 세상은 온다'를 펴냈다. 전남대와 목포대에서 강사로 활동하며 지난해에는 '문순태 문학 연구-해한의 세계'라는 연구서를 출간, 학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도 했다.지난해 12월 예향 복간을 앞두고 컴백 제의를 받게 된 그는 주저했다."광주일보 기자였다는 자부심, 그리움이 많았지만 그동안 바뀌어버린 언론환경이 좋지 않았고, 다시 입사한다는 것은 모험이라는 생각이 컸어요."그는 예전부터 광주가 문화수도를 자처한 만큼, 예향은 분명 복간할 것이고, 자신이 할 일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했다. 다만 11년을 쌓아온 학자의 길을 되돌리긴 어려웠다고. 주저함 끝에 강의와 기자를 병행한다는 조건으로 돌아왔다."오전엔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의 시선으로, 업무는 기자의 시선으로, 글은 작가의 시선으로, 스스로가 역동적이고 재미있다고 느낍니다. 조화를 이룬다면 글쓰기에도 보탬이 되겠죠."문화생활부의 문학담당 기자 겸 예향 기자로 일하게 된 그는 문학전문기자를 꿈꾼다고 했다. 전문가로서 독자들이 '박성천'이라는 이름만 봐도 '아! 글 잘 쓰는 그 기자'라고 부를 정도가 돼야한다는 것. 11년의 공백을 두고 돌아온 그는 과거와 비교해 후배 기자들에게 바람도 남겼다.후배들이 성실해진 반면 정적으로 변해 안타깝다고, 과거의 기자들은 야성과 모험을 즐겼지만 후배기자들의 엉덩이가 무거워 보인다고 했다. 더불어 보다 마음가짐을 단단히 하라는 주문도 전했다."자부심으로 똘똘 뭉쳤던 기자생활을 관둔 뒤 11년은 가혹했어요. 직장의 소중함을 느끼며 성찰의 시간이었거든요. 그런데 꿈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으면서 하고 싶던 일을 하게 됐습니다. 언론 환경이 나빠진 건 사실이지만 우리 후배들이 너무 좌절하기 보다는 이겨내고 도전했으면 좋겠습니다.""내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까. 40대 중반에 접어들었지만 지금도 나를 사로잡는 궁금증이에요. 강사로서 자유롭고, 나만의 세계가 있다는 충만감이 있지만 소속감이 없는 이 직업이 두렵기도 했어요." 임동률 편집위원
광주전남기자협회 13-03-19 조회4712
한국언론재단 교육프로그램 지상중계 새로운 기사 쓰기를 위해 안수찬 한겨레 사회부 24시팀장 근대 신문이 처음 등장했을 때, 저널리즘의 지배적 장르는 논설과 칼럼이었다. 생각과 주장을 밝혀 적는 게 당시 기자의 임무였다. 지식인들이 주로 기자 노릇을 했다. 그런데 논설과 칼럼에는 한계가 있었다. 식견을 갖추지 못한 독자는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논설과 칼럼은 지식인을 위한 글쓰기였고, 기자는 지식층을 주로 상대했다.20세기 중반 등장한 스트레이트라는 기사 장르가 이를 뒤집었다. 글자만 읽을 수 있다면, 사전 지식이 없더라도 충분히 사건의 핵심을 이해하도록 돕겠다는 게 스트레이트의 '장르적 전략'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신문과 방송이 생산하는 기사의 95% 이상은 스트레이트 기사다. 언론사에 입사해서 처음 배우는 (그리고 유일하게 배우는) 글쓰기도 스트레이트 기사다.몇몇 기사 장르 가운데 유독 스트레이트가 오늘날의 기자들을 지배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스트레이트는 본질적으로 '선동적'이다. 복잡한 사안의 핵심을 가장 쉬운 언어로 정돈해 압축적으로 전달하면서, 사태가 이런데도 가만 있을 거냐고 세상 다수를 향해 묻는 글이다. 스트레이트에 이르러 비로소 기자는 소수 지식인이 아니라 '독자대중'과 직접 만나게 됐다.그런데 스트레이트에도 한계가 생겼다. 핵심과 본질을 한 호흡에 드러내려고 추상적, 경직적, 형식적 정교화를 거듭한 나머지 스트레이트 기사 자체가 읽기 어렵고 따분한 글이 돼 버렸다. 스트레이트 기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글의 어휘, 문장, 구성과 많이 다르다. "기사를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여기에서 비롯했다.원래는 논설이나 칼럼의 엘리트주의를 극복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언어로 사실을 전달하려 했지만, 이제는 평범한 사람들이 스트레이트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스트레이트는 판사의 판결문, 교수의 논문처럼 특정 직업 세계 안에서만 통용된다. 쉽게 말해, (애초 취지와는 달리) 독자는 이해 못하고 기자들끼리만 생산하고 소비하고 품평하는 글쓰기 장르가 되고 있는 것이다.미국 언론에선 1990년대부터 '내러티브 기사'가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다. 이미 영미 언론의 각종 탐사기획보도는 거의 전부가 '내러티브 라이팅' 방식으로 쓰여지고 있다. 그것은 스트레이트를 대체하진 못했지만, 스트레이트를 보완하고 극복하는 새로운 기사 장르다.내러티브 기사는 인물 중심으로 사건의 전모를 드러낸다. '내러티브'의 어원 자체가 '모든 것을 이야기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내러티브는 사건이 아니라 인물을 중심으로 세계를 설명하고, 이를 기승전결 구조를 통해 풍부하고 깊게 드러내는 전략을 택한다. 그것은 한편의 소설 또는 영화를 연상시킨다.내러티브 기사는 진실의 전모를 확인하려는 독자 요구에 부응한다. 진짜 진실이 무엇인지 알기 힘들다는 독자들에게 사건의 발생과 전개를 모두 밝혀 줄 수 있다. 재미를 추구하는 대중의 취향에도 부응한다. 기사는 딱딱하고 무미건조하다는 편견을 깨고 흥미진진한 방식으로 세계를 드러낸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소재를 다뤄서가 아니라, 실제 인물과 사건을 역동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통해 독자들의 몰입을 이끌어낸다.스트레이트 기사는 모든 사실을 사건 구조로 바라본다. 반면 내러티브 기사는 모든 사실을 인물 구조로 바라본다. 세계는 사건이 아니라 인물의 총체이며, 인물을 통해 사건을 더욱 잘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이 내러티브 기사의 바탕에 있다.스트레이트 기사에서 사건은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것처럼 불쑥 등장한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정상적이었는데 문제적 인물이 어느 날 갑자기 살인을 저질렀다는 식이다. 반면 내러티브에서 사건은 '(갑작스런) 발생'이 아니라 '(갈등적 인물과 함께) 성장하고 진화'한다. 사건의 탄생, 전개, 절정, 해소(또는 파국)에 이르는 과정 전부를 드러낸다.스트레이트 기사는 사실에 대해 독자들이 거리를 두게 해 실체를 파악하도록 한다. 상반된 입장의 두 사람을 등장시키고,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확정할 수 없으니 일단은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의 진술을 모두 들어보자는 태도를 취한다. 반면 내러티브 기사는 독자 스스로 여러 당사자의 입장에 서서 사건을 체험하도록 한다. 진실이 무엇인지 확정할 수 없다는 태도는 비슷하지만, '거리두기' 전략의 스트레이트와 달리 '체험하기' 전략을 제공한다.스트레이트와 내러티브를 비교하는 것은 어느 것이 옳고 그른 것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는다. 각각의 바탕에는 객관주의 저널리즘과 뉴 저널리즘이라는 거대한 관점의 차이도 있다. 이를 논구하는 것은 언론학자들의 몫이다.기자라면 도대체 내러티브가 무엇인지부터 들여다볼 궁리를 하는 게 좋다. 하버드대학 니먼재단의 '내러티브 아카이브'라는 곳에 가면 그 빛나는 기사들을 볼 수 있다. 웹 주소로 이 글의 끝을 대신한다. http://www.niemanstoryboard.org
광주전남기자협회 13-03-19 조회3746
방송 파업 불씨는 연전히 현재 진행형 - 광주 MBC 노조, 정관개정 요구·사장 출근 저지 투쟁 "자율경영 침해·언론 장악 김재철 사장 해임해야"
광주전남기자협회 13-02-04 조회35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