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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3,794 / 등록일 : 13-03-19 16:21
새로운 기사 쓰기를 위해
안수찬 한겨레 사회부 24시팀장
근대 신문이 처음 등장했을 때, 저널리즘의 지배적 장르는 논설과 칼럼이었다. 생각과 주장을 밝혀 적는 게 당시 기자의 임무였다. 지식인들이 주로 기자 노릇을 했다. 그런데 논설과 칼럼에는 한계가 있었다. 식견을 갖추지 못한 독자는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논설과 칼럼은 지식인을 위한 글쓰기였고, 기자는 지식층을 주로 상대했다.
20세기 중반 등장한 스트레이트라는 기사 장르가 이를 뒤집었다. 글자만 읽을 수 있다면, 사전 지식이 없더라도 충분히 사건의 핵심을 이해하도록 돕겠다는 게 스트레이트의 '장르적 전략'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신문과 방송이 생산하는 기사의 95% 이상은 스트레이트 기사다. 언론사에 입사해서 처음 배우는 (그리고 유일하게 배우는) 글쓰기도 스트레이트 기사다.
몇몇 기사 장르 가운데 유독 스트레이트가 오늘날의 기자들을 지배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스트레이트는 본질적으로 '선동적'이다. 복잡한 사안의 핵심을 가장 쉬운 언어로 정돈해 압축적으로 전달하면서, 사태가 이런데도 가만 있을 거냐고 세상 다수를 향해 묻는 글이다. 스트레이트에 이르러 비로소 기자는 소수 지식인이 아니라 '독자대중'과 직접 만나게 됐다.
그런데 스트레이트에도 한계가 생겼다. 핵심과 본질을 한 호흡에 드러내려고 추상적, 경직적, 형식적 정교화를 거듭한 나머지 스트레이트 기사 자체가 읽기 어렵고 따분한 글이 돼 버렸다. 스트레이트 기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글의 어휘, 문장, 구성과 많이 다르다. "기사를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여기에서 비롯했다.
원래는 논설이나 칼럼의 엘리트주의를 극복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언어로 사실을 전달하려 했지만, 이제는 평범한 사람들이 스트레이트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스트레이트는 판사의 판결문, 교수의 논문처럼 특정 직업 세계 안에서만 통용된다. 쉽게 말해, (애초 취지와는 달리) 독자는 이해 못하고 기자들끼리만 생산하고 소비하고 품평하는 글쓰기 장르가 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언론에선 1990년대부터 '내러티브 기사'가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다. 이미 영미 언론의 각종 탐사기획보도는 거의 전부가 '내러티브 라이팅' 방식으로 쓰여지고 있다. 그것은 스트레이트를 대체하진 못했지만, 스트레이트를 보완하고 극복하는 새로운 기사 장르다.
내러티브 기사는 인물 중심으로 사건의 전모를 드러낸다. '내러티브'의 어원 자체가 '모든 것을 이야기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내러티브는 사건이 아니라 인물을 중심으로 세계를 설명하고, 이를 기승전결 구조를 통해 풍부하고 깊게 드러내는 전략을 택한다. 그것은 한편의 소설 또는 영화를 연상시킨다.
내러티브 기사는 진실의 전모를 확인하려는 독자 요구에 부응한다. 진짜 진실이 무엇인지 알기 힘들다는 독자들에게 사건의 발생과 전개를 모두 밝혀 줄 수 있다. 재미를 추구하는 대중의 취향에도 부응한다. 기사는 딱딱하고 무미건조하다는 편견을 깨고 흥미진진한 방식으로 세계를 드러낸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소재를 다뤄서가 아니라, 실제 인물과 사건을 역동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통해 독자들의 몰입을 이끌어낸다.
스트레이트 기사는 모든 사실을 사건 구조로 바라본다. 반면 내러티브 기사는 모든 사실을 인물 구조로 바라본다. 세계는 사건이 아니라 인물의 총체이며, 인물을 통해 사건을 더욱 잘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이 내러티브 기사의 바탕에 있다.
스트레이트 기사에서 사건은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것처럼 불쑥 등장한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정상적이었는데 문제적 인물이 어느 날 갑자기 살인을 저질렀다는 식이다. 반면 내러티브에서 사건은 '(갑작스런) 발생'이 아니라 '(갈등적 인물과 함께) 성장하고 진화'한다. 사건의 탄생, 전개, 절정, 해소(또는 파국)에 이르는 과정 전부를 드러낸다.
스트레이트 기사는 사실에 대해 독자들이 거리를 두게 해 실체를 파악하도록 한다. 상반된 입장의 두 사람을 등장시키고,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확정할 수 없으니 일단은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의 진술을 모두 들어보자는 태도를 취한다. 반면 내러티브 기사는 독자 스스로 여러 당사자의 입장에 서서 사건을 체험하도록 한다. 진실이 무엇인지 확정할 수 없다는 태도는 비슷하지만, '거리두기' 전략의 스트레이트와 달리 '체험하기' 전략을 제공한다.
스트레이트와 내러티브를 비교하는 것은 어느 것이 옳고 그른 것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는다. 각각의 바탕에는 객관주의 저널리즘과 뉴 저널리즘이라는 거대한 관점의 차이도 있다. 이를 논구하는 것은 언론학자들의 몫이다.
기자라면 도대체 내러티브가 무엇인지부터 들여다볼 궁리를 하는 게 좋다. 하버드대학 니먼재단의 '내러티브 아카이브'라는 곳에 가면 그 빛나는 기사들을 볼 수 있다. 웹 주소로 이 글의 끝을 대신한다.
http://www.niemanstoryboard.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