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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 본 나의 기자생활 - 공이송(전 광주일보 주필)

작성자 : 광주전남기자협회 (211.198.190.***)

조회 : 3,529 / 등록일 : 14-09-23 16:36

 

 공이송전 주필은

 - 전 광주일보 편집국장·주필
 - 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 전 동신대학교 객원교수


<사진설명>

1992년 노태우대통령과 단독 특별회담.

 

 

국가도 못말린 언론인의 고집(?)


종군기자 순직했던 금문도 방문 밀어부쳐


광주~순천 4차선확장 대통령 담판 화제

 


  뭘 쓸까, 망서려 진다.
  25세에 견습기자로 들어가 58세 정년할 때까지 사회부기자·사회부장·논설위원·편집국장·주필까지 두루두루 거쳤으니 왜 이야기꺼리가 없을까마는 정작 뭔가 쓰려니 정말 망서려 진다. 자칫하다간 “내가 젊었을 땐 말이야” 뭐 그런 식의 자랑이나 무용담으로 보일까 봐 걱정스럽기까지 한다.


  기자라는 직종은 소신과 신념과 투철한 사명감을 먹고 산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꺾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몸에 배게 되고 또 그것을 덕목으로 삼고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잘 못 보이면 소신이 아니라 고집쟁이로 보이기도 한다.
나는 고집쟁이이었을까. 고집으로 빚어진 일화들이 떠 오른다.


  1973년 자유중국 여행 때의 일이다. 한국기자상 수상자들을 자유중국 정부가 초청해서 가게 된 여행이었다. 그때 난 말할 수 없이 들떠 있었다. 난 생 첫 해외여행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내가 특별히 가고 싶다고 신청했던 금문도를 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금문도는 대만과는 190km나 떨어져 있지만 중국본토와는 불과 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작은 섬. 자유중국으로서는 작전상 요새이지만 중국으로서는 눈에 가시 같은 섬.


  1958년 중국이 이 섬을 공격해 전투가 한창 치열할 때 우리나라 한국일보 최병우기자가 종군하다가 실종됨으로서 우리 언론인들에게는 남다른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섬이었다. 최기자는 금문도에서 종군취재 중 교통사고를 당해 타이페이로 후송돼 간단한 치료를 받고 성치 않은 몸으로 다시 금문도로 가 상륙하다 다른 외국인 종군기자들과 함께 실종되었던 것.


  1958년 8월23일부터 10월5일까지 계속된 이 전투에서 중국군이 퍼 부운 포탄이 무려 47만발이었다니 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만하다. 최병우기자가 순직한 날은 9월26일. 당시 최기자의 나이 34세였다.


  군 수송기에 몸을 실은 일행들은 흥분과 설레임에 취해 있었다. 안개가 자욱한 바다위를 저공비행하며 나는 것도 스릴이 있었다. 얼마쯤 갔을까. 안개가 너무 자욱해서 금문도에 착륙하지 못하고 팽호도에 불시착. 몇 시간을 보내다 결국 타이페이로 회항을 했고 우리 일행을 안내한 신문국(우리나라의 문화관공부)직원과 국방부직원이 본부와 서로 연락을 하더니 3일후 다시 안내하겠다 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다. 김계원대사가 점심이나 하자는 거 였다. 알고보니 그냥 점심이 아니었다. 하얀 봉투 하나씩을 식탁위로 내 밀더니 내일 금문도 가는 걸 양보해 달라는 것이었다. 국회의원 몇 분이 금문도를 가고 싶어 하니까 우리더러 양보하라는 것이었다.


  양보할 리가 없다. 우리는 자유중국정부의 초청을 받고 왔고 초청내용에 금문도 방문계획이 들어 있다는 점을 들어 양보할 수 없다고 버텼다. 그래도 김대사는 국방위원도 있고 그러니까 국익 차원에서라도 꼭 국회의원들이 가야하지 않겠느냐며 달래는 것인지 엄포를 놓은 것인지 막무가내였다. 김대사는 중앙정보부장을 하다가 자리를 옮겨온 분. 줄다리기 거의 1시간. 우리를 안내했던 신문국직원이 눈치를 채고 다음 일정 시간이 없다고 재치를 발휘하는 바람에 죄송하다며 자리를 떴다.


  나의 이 고집은 다음날 금문도에 가면서 내내 회자됐다. 일행들은 내가 고집을 부리지 않았으면 못 오게 되었을 거라며 고마워하기도 했다.


  고집하면 또 하나 두고두고 기억되는 것이 있다. 1992년 4월25일 광주일보 창간 40주년을 맞아 노태우대통령 특별 단독회견 때다.


  대통령 특별회견엔 질문 내용을 미리 청와대공보비서실에 보내 조율하는 것이 상례였다. 이에 따라 몇 가지 질문내용을 보냈다. 북방문제라던지 광주학숙 건립문제 그리고 호남고속도로 광주 순천간 왕복4차선 확장공사 연내 착공 등이었다.


  그런데 당시 김모 공보수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광주학숙 건립문제는 전남도에서 부지만 마련하면 건축비는 국비로 지원해 줄 수가 있는데 호남고속도로 4차선 확장공사 연내착공문제는 예산 때문에 어려우니 다른 것을 생각해 보면 어쩌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시급성을 아무리 설명해도 통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통사정하는 식의 그의 설득력에 일단 뒤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나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지게 아니면 바지게식으로 대통령에게 직접 물으려는 것이었다.


  가까이서 대면한 노태우대통령은 나에게 온화한 모습으로 보였다.
미리 제출한 질문서의 질문이 끝나자 나는 노대통령에게 전남에 큰 선물 하나를 달라고 주문했다. 큰 선물은 호남고속도로 광주 순천간 왕복4차선 확장공사라며 그 당위성과 시급함을 차분차분 설명했다.


  처음에는 예정에 없던 질문이라 조금은 의아한 듯 배석한 김수석을 힐끔 쳐다 보더니 진지하게 경청하는 듯 했다. 이 도로를 두고 호남 푸대접이라는 여론도 있다고 하자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답은 의외로 흔쾌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연내 착공에 최선을 다 하겠다고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의지가 배어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 김수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노대통령께서 연내 착공을 약속하시기는 했지만 회견기사에서는 빼 달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정상적인 방법이나 실무적으로 연내착공이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 말에 물러 날 수는 없는 일. 그래서 대통령의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것 아니냐는 둥 이미 제작회의에서 공표해 버렸다는 둥 이것이 소문나서 좋을 이유가 없다는 둥 김수석님만 믿는다는 둥 여러 이유들을 대며 버텼다. 대화중에 고집도 참 대단하다는 뭐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결국 이 기사는 다음 날인 25일 1면 머리 기사로 장식하게 되었다.
한 서넛달쯤 지났을까. 광주 순천간 고속도로 곁 곳곳에 빨간 깃발들이 나부끼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4차선 확장공사 측량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 후 4차선공사가 한창 진행중일 때 나는 이 길을 갈 때마다 속으로 우쭐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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