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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 본 나의 기자생활] 오영상 전 광주매일 사진부장

작성자 : 광주전남기자협회 (211.198.190.***)

조회 : 3,964 / 등록일 : 15-05-15 16:37

 

<사진설명>

2015년 출판한 ‘전라도야생화 표지’.

네 번째 책으로 광주, 전남·북에 자생하는 야생화 662종을 직접 촬영한 사진과 함께

도감형식으로 출판했다. 출판기념회를 찾은 광주매일 출신 선후배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되돌아 본 나의 기자생활>

오영상 해남숲문화학교 고문, 전 광주매일 사진부장

 

 

오영상 기자는

전남일보 기자, 광주매일 사진부장
굿데이신문 부장대우
국립공원관리공단 홍보담당관
해남신문 편집국장
숲해설가, 광주생명의숲 홍보위원장
환경부 환경교육홍보단 강사
해남숲문화학교 고문

 

 사진으로 역사를 기록한 사람, 고향으로 귀농해

 

 

 1991년 4월 29일 오후 전남대. 강경대 학생의 경찰폭력 사망으로 촉발된 학생들의 시위가 최고조에 이르는 시점이었다. 평소처럼 석간인 전남일보의 마감을 끝내고 오후부터 전남대생들의 집회를 사진취재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백도라 불리는 구도서관건물의 경사진 진입도로에서 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갖고 있었다. 학생들은 이날 학교 밖으로 진출하지 않고 교내집회만 한다고 해서 느슨한 분위기로 취재에 임했다. 


 그때 본부건물 뒤에서 펑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붙은 사람이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사진기자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잔디밭에 두었던 카메라를 움켜지고 현장으로 뛰었다. 몇 발자국을 걸어오던 불붙은 사람은 두 팔을 든 채로 땅위로 넘어졌다. 그리고 학생들이 불을 껐다. 내 필름에는 그 장면이 생생하게 담겼다. 바로 박승희 열사의 분신현장이었다. 


 내가 탄 취재차량이 선탑차량이 된 채 모교수의 엘란트라 차량에 실린 박 열사는 전대병원으로 달렸다. 교문 밖으로 진출한 조선대생들과 진압경찰의 대치로 차량통행이 막힌 조선대앞도로를 쌍라이트를 켜고 손수건을 흔들면서 달리는 우리 차량행렬의 기세는 투석전 자체를 무력화시키기에 충분했다. 곧바로 전대병원응급실은 쇠파이프를 든 남총련 학생들로 폐쇄됐다. 


 그 뉴스는 전파를 탔고 옆구리에서 삐삐가 요란스럽게 진동을 시작했다. 현장에서 철수하자마자 불이 붙은 채 두 손을 높이 든 박 열사의 사진은 로이터를 통해 전세계로 보내졌다. 소위 특종이다. 문제는 그때부터다. 그때까지만 해도 구난현장에서, 그러한 분신현장에서 사진기자는 어찌해야 하는지 정리가 되지 못한 채 특종에 미친 비인간적인 직업군으로 매도되고 있었다. 그저 동물적인 감각으로 카메라를 움켜쥐었던 것이다.


 “선배, 오늘 사진 좋대. 불끌 생각은 안했어”


 다음날 전대신문 후배기자의 이 충격적인 말은 특종했다고 칭찬하는 신문사 동료와 선배들의 찬사를 깔아뭉개버렸다. 며칠을 술 힘을 빌지 않고는 잠을 잘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새로 창간하는 광주매일 창간추진위원으로 건너가는 것이었다. 잠시라도 현장을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매뉴얼 없는 구난현장에서의 사진취재

 

 창간준비 작업으로 현장에서 빗겨난 탓인지 그리저리 잊고 살았다. 그리고 사진부 데스크를 일찍 맡아 현장보다는 데스크 업무를 하게 됐다. 이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매일 1면컬러사진을 제작하는 시도도 하는 등 햇병아리 사진부 데스크의 여러 가지 시도는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뜻하지 않는 걱정거리가 바로 ‘조로’하지 않기 위한 나만의 노력이었다. 그래서 찾은 것이 생태사진이었다.  글·사진을 직접 제작 ‘전라도 야생화’, ‘생태계는 살아있다’라는 컬럼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야생화, 조류를 촬영하는 생태사진가가 돼 가고 있었다. 1996년에는 조선대에베레스트 원정대원으로 세계의 지붕 에베레스트를 다녀왔다.


 2002년 ‘무등산야생화’라는 핸드북을 출판했으며 2004년에 ‘전라도탐조여행-새들아!놀자’라는 책을 출판했다. 두 번째 책을 출판하자마자 스포츠신문 굿데이신문의 3년간의 생활을 끝으로 언론생활을 마감했다. 


 2005년에 국립공원관리공단 홍보담당관으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3년8개월간의 서울생활이다. 처음에는 전국의 국립공원 탐방로를 찾아 마치 레저여행판처럼 인터넷컨텐츠를 생산하는 것이었지만 환경부 출입기자단을 상대하는 대언론업무를 맡았다. 


 2008년 MB정권이 들어서자 서서히 조여 오는 그들의 압박에 그만 다음해에 결단을 내렸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고향해남으로 귀농하는 것이었다. 집사람의 퇴직금 중간정산으로 부지를 마련하고 뇌경색으로 투병생활을 하시는 아버님을 모시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큰 목표는 생태체험농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다소 생소한 숲해설가 자격증과 굴삭기면허증을 획득했다. 국립공원은 천연림에 탐방로를 만들어 생태체험을 하는 것이지만 나는 굴삭기로 직접 탐방로를 아기자기하게 꾸민 다음 식재를 해 나무가 자라면 생태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싶어서다.

 

민주언론상, 지역신문컨퍼런스 대상 수상

 

 2010년 전국 지역주간지의 롤모델이라 할 수 있는 해남신문의 편집국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집사람과 가족들의 반대도 있어 몇 번 고사했지만 ‘지역으로 와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을 외면하면 혹시 나중에 지역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충고를 받아들여 맡기로 했다. 1990년 지방자치제도의 부활과 함께 군민들이 비료값과 농약값을 쪼개 소액주주로 만든 군민이 주인인 신문이며 편집과 경영이 엄격하게 독립돼 있었다. 


 정말 열심히 했었다. 쓸개제거수술을 받을 정도로 마지막 언론생활이라는 각오로 고향의 바른언론을 위해 매진했다. 편집권 독립은 철저히 보장됐으며 모든 결정은 편집국장인 내가 했으며 그 결정에 관한한 무한책임을 지는 환상적인 구조였다. 2012년 군수까지 앞장서서 해남에 화력발전소를 유치하겠다는 시도를 막아낼 수 있었다. 원전을 유치하겠다는 시도가 좌절되자마자 시작된 엉터리같은 시도였다. 그해 광주전남민주언론시민연합의 민주언론상 특별상을 받았다. 취재기자도 지역신문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최초로 2관왕을 받은 것이다. 또 지역신문발전위가 주최하는 2012 지역신문컨퍼런스에서 대상인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받았다.


‘농사짓는 편집국장’이라는 닉네임을 가질 정도로 농삿일도 열심히 했다. 2011년 ‘땅끝해남의 자연자원’이라는 세 번째 책도 출판했다.


 지난해 건강도 건강이지만 지역신문 편집국장이라는 자리가 권력화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신문사를 떠났다. 지역 어르신들의 만류도 뿌리친 채 농장으로 돌아가겠다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여러 가지 상황은 나를 농장에 그대로 두지 않기도 했다. 올 2월 ‘전라도야생화’를 출판했다. 총 662종의 광주, 전남·북에 자생하는 야생화를 직접 촬영한 사진과 함께 도감형식으로 출판했다. 704쪽이니 대작임에 틀림없다. 


 총 20년간의 기자생활, 그저 치열하게 살았다. 열심히 살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 다들 열심히 살기 때문이다. 또 고집스럽게 살았다. 특히 해남신문 편집국장 자리는 더욱 그렇다. 오직 창간정신과 바른언론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마지막 언론생활을 부끄럽지 않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땅끝에서 생태체험농장의 빗장을 여는 그날, 선·후배 기자 여러분의 재충전을 위해 초대장을 보낼까 한다. 건강한 기자생활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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