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숨결 깃든 공간, 생명력을 얻다박진현 광주일보 선임기자 책 출간루르 박물관 등 국내외 21곳 소개 문화를 매개로 한 도시재생을 취재해온 박진현 광주일보 선임기자 겸 문화·예향 국장이 책 ‘도시재생, 문화가 미래다’(엔터 펴냄)를 출간했다. 그는 국내 11곳·국외 10곳 등 대표적인 ‘문화적 도시재생’ 공간 21곳을 취재했다. 광주시민회관 FoRest971, 담양 해동예술촌 등 지역 공간과 완주 삼례문화예술촌, 제주 아라리오 뮤지엄, 독일 에센 루르박물관, 뉴욕하이라인파크 등 국내외 곳곳을 누볐다. 박 기자는 오래된 기억의 공간을 문화로 살려낸 도시재생의 가능성을 들여다봤다. 책에서는 개별 도시들이 지닌 고유한 정신적·문화적 가치를 도시재생과 연관해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고 있는 사례를 소개했다. 수년간 국내외 도시재생의 현장과 공간을 취재한 내용을 토대로 문화적 재생의 가치와 의미를 담았다. “낡은 건물을 철거하고 새 건물을 짓는 전통적인 도시개발 대신 지역의 역사와 흔적을 간직한 공간에 문화와 스토리텔링을 엮은 재생은 도시의 정체성과 지역 공동체를 살리는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추억의 공연장이 청춘의 숲으로 변신한 광주시민회관 FoRest971은 ‘근대건축이 청년과 통(通)한’ 상징적인 공간이다. 담양 해동문화예술촌은 막걸리 주조장의 정체성을 살린 독특한 전시구성과 콘텐츠로 이목을 끌었다. 이밖에 문화공간으로 변신한 문화역 서울284, ‘한국의 산토리니’ 부산 감천문화마을, 시민이 주도한 문화 아지트 일본 가나자와 시민예술촌, 도시재생 새 패러다임을 연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 등도 소개한다. 지난 2006년부터 광주일보에 칼럼 ‘박진현의 문화카페’를 연재하고 있는 박 기자는 33회 최은희 여기자상(2016년)을 받았다. 저서로 ‘처음 만나는 미국미술관’, ‘도시의 아이콘, 아트센터’, ‘문화 만나러 떠날까? 세계 서점, 미술관 여행’ 등이 있다. 백희준 편집부위원장
광주전남기자협회 23-07-05 조회230
광주전남기자협회 2019 올해의 기자상 심사평 심사위원장 류한호 (광주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광주전남기자협회 올해의 기자상은 2019년 한 해 동안 광주전남지역에서 활동하는 기자들이 생산한 수많은 기사들 중에서 우수한 작품을 선정하여 수상하는 것이다. 올해는 6개 각 분야별로 좋은 기사들이 생산되었다. 출품작을 일별한 심사위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좋은 작품이 많다는 데 동의했다. 지역언론은 신문이나 방송을 막론하고 그 상황이 급격하게 어려워지고 있다. 하지만 기자들이 보유하고 내뿜는 기는 강력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019년 광주전남기자협회 올해의 기자상 수상작들은 유난히도 정치경제권력을 가진 자들이 감추는 것을 파헤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다수 수상작들은 지역사회의 현안에 깊은 관심을 갖고 이를 심층적으로 탐사하는 강력한 기자정신을 보여 주는 데 성공했다. 정치경제권력을 가진 자들은 이익관심에 따라 움직이고,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무언가를 감추려 드는 경우가 많다. 언론이 수행하는 기능 중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은 환경감시기능이다. 사회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 사안들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여 사회구성원들이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언론의 일차적 과제다. 이를 통해 변화와 문제를 알아야 사회구성원들이 그 위기를 인식하고 서로 의논해서 대책을 세울 수 있다. 이것은 문제해결을 위한 사회구성원들이 토론과 협력과 여론형성기능이다. 환경감시기능이 작동하는 것은 자연환경의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환경감시는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시스템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비리를 찾아내고 이를 시민들에게 알리는 일을 말한다. 기자들이 담당하는 일이다. 기자가 감을 잡고 그 비밀을 파헤치려 하면 감추기는 더욱 교묘하고 집요해진다. 찾아내는 기자와 감추는 권력의 대립구도 속에서 저널리즘은 존재이유를 찾는다. 이 일을 잘 하도록 하기 위하여 국민들은 기자들에게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부여했다. 기자들은 이 위탁받은 자유를 구현하기 위하여 사명감을 갖고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기자의 힘이고 숙명이다. 하지만 쉽지 않은 가시밭길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영역에서 힘을 가진 자들은 만만치 않다. 그들은 감추기만 하는 게 아니라 기자들과 언론을 위협하기도 한다. 이 힘과 대립하는 일은 어렵다. 하지만 2019년 광주전남 기자들은 열심히 캐내고, 오랜 시간을 들여 깊이 파고 들었다. 올해의 기자상에 출품된 작품은 총 76편이었다. 분야별로는 신문통신 취재보도 20건, 신문통신기획보도 13건, 신문편집 9건, 사진보도 8건, 방송취재보도 12건, 방송기획보도 14건이었다. 출품작들이 좋아서 심사를 마치기까지는 예상 밖으로 시간이 많이 들었다. 심사결과 신문통신취재보도 부문에 출품된 <'의혹투성이' 민선 6기 광주시-맥쿼리 제2순환도로 변경 협약> (광주일보 윤현석, 오광록, 김형호)을 대상으로 선정했다. 이 기사는 말썽 많은 제2순환도로 문제와 관련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정보를 장기간에 걸쳐 수집하고, 다양한 각도에서 심층적으로 살폈다. 신문통신 취재보도부문 최우수상으로는 <'국민 안전 위협하는 한빛원자력발전소의 실태> (광남일보 정규팔)을 뽑았다. 이 작품은 최고수준의 보안시스템 때문에 접근하기가 원천적으로 어려운 원자력발전소에 생긴 심각한 균열 문제를 깊이 있고 정확하게 들여다 보았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았다. 신문통신기획보도부문에서는 <교통복지의 늪, 광주 버스 준공영제 대안은 없나> (남도일보 정세영, 이은창, 임소연)를 최우수상으로 선정했다. 시민의 일상적 삶과 관련된 주제를 선정하여 그 허실을 다각도로 살펴 보고 그 대안을 모색한 이 기사는 지역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해결방안을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신문편집부문에서는 <역사관련 편집> (전남일보 홍성장 외)을 최우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사진보도부문 최우수상은 <'"왜 이래" 질문 뿌리치는 전두환> (연합뉴스 정회성)이 선정했다. 지역사회의 이슈와 관련된 결정적 순간을 놓치지 않고 순간포착하여 사진으로 만든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방송취재보도부문에서는 최우수상으로 <'분리배출하라면서 청소업체가 '불법매립'> (광주MBC 남궁욱, 강성우, 이정현)을 뽑았다. 이 기사는 기자들이 발품뿐만 아니라 몸을 사용하여 청소업체가 설치한 다양한 방어장치를 뚫고 취재보도하는 용기를 보여 주었다. 방송기획보도부문에서는 <KBS순천 특별기획 - '미세먼지, 잿빛 연기의 경고'> (윤주성, 박석수)를 최우수상으로 선정했다. 유독 환경과 안전문제가 현안으로 떠오른 올해 사람들의 일상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 미세먼지는 배출하는 거대 제철회사가 저지르는 문제를 심층적으로 보도한 것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최우수상이 아닌 우수상으로 선정된 작품들도 대체로 모두 최우수상과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것들이 많았다. 심지어 우수상을 받지 못한 작품들도 상당수가 수상작으로 손색없다 할 정도로 질이 좋았다. 종합하면 2019년 광주의 저널리즘은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기자들이 발로 뛰면서 쓰는 기사들이 많아졌고, 그 질도 좋았다는 것을 명기하지 않을 수 없다. 발생하는 사건들을 사실 그대로 보도하는 객관보도는 매우 중요한 저널리즘 원칙이다. 하지만 기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인식하고 그 길을 묵묵히 단단하게 걸어가면서 지역의 문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그 해답을 찾아내는 믿음직한 기자의 모습은 더욱 중요하다. 가짜뉴스와 정당과 일체화된 편파저널리즘, 소유주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방패막이 저널리즘 등으로 총체적인 신뢰의 위기에 빠진 한국언론의 그림자에 환한 빛을 드리운 광주전남의 언론이 2010년대에도 이어지길 기대한다.
광주전남기자협회 20-02-06 조회1892
[기고] 윤석년 광주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유능한후보 알리기 노력을 지역언론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지적이 있지만 실제 선거에서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총선에 나서는 예비 후보자의 인지도를 높이는데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총선을 준비하는 예비 후보자들은 명함과 선거 사무실에 걸린 현수막 또는 휴대폰 문자와소셜미디어 등 새로운 매체를 통해 후보자 알리기를 하고 있지만, 실제 신문 지면이나 방송 뉴스에 다뤄질 경우인지도 제고 효과는 훨씬 커진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후보자가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발로 뛰는 선거 운동도 필요하지만, 실제로 언론을 통한 인물과 공약 알리기가 함께 이뤄질 때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지금까지 우리 지역에서 이뤄진 총선은 매번 지역 정서에 기대어 압도적 지지를 받고 이른바 '공천이 곧 당선'이라는 구도가 이어져 왔다. 4·13 총선은 이전 선거와 달리 유권자들에게 특정 정당과 후보자 선택 기회를 확대해 주는 선거다. 현역 의원들과 새로 선거에 뛰어든 인물들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형국이다. 현역 의원은 물론 예비 후보자들은 공천받기도 만만치 않고, 공천이 되더라도 여차하면 총선에서 낙선할 가능성도 전에 비해 훨씬 높은 편이다. 4·13 총선보도는 정당과 총선 공약 그리고 출마 후보 정보 제공에 있어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 언론은 지면과 시간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우선적으로 지역 내 출마자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유권자에게 알리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또 선거구 획정이 늦어지면서 새로운 후보의 인지도는 현역 의원들에 견주어 상대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다. 지역 언론은 현역 프리미엄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새로운 도전을 하는 인물들을 소개하는 데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아울러 지역언론이 지역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갖고 또 이를 미래의 청사진으로 그려갈 수 있는 유능한 인재가 누군지 유권자들에게 제대로 알려주는 계도적 역할도 곁들이게 되면 금상첨화다.
광주전남기자협회 16-03-10 조회3526
<사진설명> (상) 우-부엉산 유골을 발굴한 뒤 구멍난 두개골을 들고 감식결과를 발표하는 이정빈 전 서울대 법의학과 교수 (하) 좌- 부엉산 앞에서 증언하는 땅꾼 김영길(왼쪽)씨와 녹음중인 박용수기자 (우)-박용수 기자(왼쪽)와 제보자 김영길(가운데)씨, 정상용 전 국회의원(오른쪽)이 유골 발굴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전문가의 벽 뛰어 넘어라 박용수 前광주CBS 보도국장(광주시 비서실장) ▲ 진도출신 목포고· 전남대·광주대언론대학원▲ 1985년 광주CBS 입사▲ 1997년 광주CBS 보도국장▲ 1998~2005년 CBS 본사 문체부장·사회부장·경제부장·편집부국장▲ 2006년 광주CBS 본부장▲ 2010년CBS 상무 1989년말 전두환 전대통령이 백담사에 유배되면서 5공 청산정국이 펼쳐졌다. 국회 5공청문회와 5·18 청문회가 연일 전국에 생중계되고 5공 비리와 광주 학살의 진상이 속속 드러났다. 노무현 의원은 증언석의 전두환을 향해 명패를 던지며 포효해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1989년 1월. 기자로서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과 의무'로 5·18 진실 규명에 매달릴 때였다. 귀가 번쩍 트이는 제보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광주에서 화순가는 길목의 부엉산에서 5·18 직후 총구멍난 유골이 나뒹구는 것을 봤다는 제보였다. 김영길, 그의 이름 석자를 처음으로 공개한다. 5·18역사에 그의 이름을 '부엉산 5·18유골제보자'로 기록하고 싶다. 그가 아니었다면 5·18학살의 또 하나의 진실이 영원히 묻힐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땅꾼이었다. 당시 나이가 21살이니, 5·18 당시 12살. 그가 제보를 결심한 동기가 있었다. TV에서 5·18청문회 생중계를 시청하면서였다. 5·18직후 부엉산에서 봤던 유골이 5·18 진상 규명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어 제보를 결심한 것이다. 1980년 5월 말 그는 부엉산에 뱀잡으러 갔다가 머리에 총구멍이 난 주검을 발견했다. 부엉산 큰 암벽 아래 비탈이었다. "머리는 떨어져 나간 채 몸체만 나뒹굴고 있더라구요. 10여 미터 아래에 두개골이 따로 있었는데 총에 맞아 뒷통수에 구멍이 휑하게 나있습디다." 현장으로 달려갔다. 수습 중이던 임영호 기자가 동행했다. 40여분 오르니 응달진 곳에 돌무더기가 나타났다. 김영길은 10여 미터 낭떠러지 밑 평지를 지목했다. 체육복바지 헝겊 일부가 노출돼 있었다. 낙옆과 흙을 걷어 내자 형체가 드러났다. 암벽 위로 올라가니 5·18때 광주를 포위한 계엄군 경계 초소가 있었고 광주-화순간 국도가 내려다 보였다. 계엄군이 시내버스에 총을 난사해 선량한 시민과 학생들이 집단 학살당한 바로 그 도로 근처였다. "이쪽으로 와 보세요! 이거 보세요." 그는 돌더미에서 돌 하나를 들어 올린 뒤 두개골을 꺼내 보여 줬다. 아이들 주먹 크기의 구멍이 뚫린 두개골이었다. 9년 전 땅꾼 형제가 돌더미에 숨겨놓은 5·18 희생자의 유골이 마침내 형체를 드러낸 것이다. 다음날 아침, CBS아침종합 뉴스에 "5·18때 머리에 총을 맞아 숨진 뒤 방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광주 부엉산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을 전국 뉴스로 리포트했다. 특종의 기쁨보다 '살아 남은 자의 의무 가운데 하나'를 했다는 감격이 밀려왔다. 파장은 컸다. 깊은 산속에 버려진 5·18 유골 발견은 5·18청문회 정국의 핫 이슈로 부각됐다. 야당이 쟁점화하면서 며칠 뒤 부엉산에서 검찰의 지휘 아래 유골 발굴과 감식 작업이 이뤄졌다. 발굴작업과 감식은 서울대 법의학과 이정빈 교수가 맡았다. 국내 최고의 법의학 전문가였다. 확실한 목격자가 나타난 터라 감정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발굴 작업만하던 이교수가 입을 열었다. "두개골 뒷통수 구멍이 왜 생겼는지,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어서 총탄같은 빠른 충격이 원인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총에 맞았을 가능성을 사실상 부인하는 것이었다. "시신의 체육복 바지에서 나온 고무줄인데요, 9년 된 고무줄이 쌩쌩한 거 봤습니까? 사망한지 한 3년? 길어야 5년 정도 된 걸로 보입니다." "부엉산 유골 5·18 무관" 법의학자 감정 뒤집어특종 기쁨보다 '살아 남은 자의 의무'했다는 감격'국민 알권리'위해 전문영역 감시 책무 잊지 않길 실망감이 팽배했지만 누구도 전문가 소견을 반박할 수 없었다. 5·18단체 회원들은 "봤다는 사람이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항의했다. 다음날 5·18행불자 가족들은 광주 공항까지 쫒아가 이 교수를 막고, '진실을 왜곡하지 말라' '희생자를 두 번 죽이지 말라'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전문가라는 이름이 갖는 권위는 대단했다. 법의학 전문가의 감정결과로 부엉산유골은 언론의 관심에서도 사라졌다. 취재기자들은 대부분 종쳤다는 표정이었다. 검찰도 '괜히 한차례 소동을 폈다'는 반응이었다. 김씨의 증언은 전문가 이름 앞에 철저히 배척됐다. 내게도 깊고 무거운 침묵이 엄습했다. "형님 내가 뭐라고 하던가요, 특종은 항상 위험하다니깐!" 후배 기자의 말은 더욱 아프게 폐부를 찔렀다. 땅꾼 김영길과 법의학 전문가 이정빈 교수, 누구의 말이 진실인가? 이대로접어도 되는 것인가? 뱀만 잡는 김씨가 거짓말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납득할 수 없는 감정 결과를 뒤집을 방법은 없는지 찾기 시작했다. 부엉산에서는 유골과 함께 남성 체육복 하의가 수거됐다. 주머니에는 담배 필터와 망가진 성냥갑이 들어 있었다. 담배필터의 길이는 22mm, 은박지는 절반은 미끈하고 절반은 요철상태였다. 추정컨대 희생자는 체육복을 입고 광주를 빠져나가다 사살됐고 22mm 필터담배를 피운 흡연가였다. 양담배 수입이 금지된 시절이라 그가 핀 담배는 100% 국산담배였다. 담배 필터와 은박지 제조시기를 알면 사망시기 추정이 가능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광주 연초제조창으로 달려갔다. 책임자에게 불이익이 돌아가지 않게 하겠다고 통사정 후1970년대 이후 담배표준 제작지침을 볼 수 있었다. 담배필터 길이와 은박지 모양이 언제 어떻게 달라졌는지 메모하며 확인 작업을 벌였다. 예상은 적중했다. 담배표준 제작 지침에 중요한 단서가 있었다. 대한민국 모든 담배가 22mm필터로 바뀐 것은 1979년 10월 이후였다. 시신에서 나온 은박지는1983년 3월 이후 생산이 중단된 사실도 확인됐다. 부엉산 유골의 주인공은 1979년 10월부터 1983년 3월사이에 사망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했다. 길어야 3년 됐다고 단언한 이 교수의 감정결과를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었다. "법의학 전문가가 5·18과 무관하다고 감정했던 부엉산 유골이 1979년에서 1983년사이에사망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광주CBS 취재팀이 전매청의 담배표준 제작지침을 분석한 결과, 시신에서 수거된 담배의 생산시기가 1979년10월에서 1983년 3월 사이로 밝혀졌습니다." 다음날 아침 7시30분, CBS 아침종합뉴스에 두 번째 특종리포트가 전국에 울려 퍼졌다. 첫 보도보다 파장이 더 컸다. 관계 기관의 확인 전화가 빗발쳤다. 정상용 의원은 기자회견을 갖고 CBS보도 내용을 제시하면서 5·18진상규명을 촉구하고 나섰다. 5·18단체들도 5·18 암매장의 진실을 밝힐 것을 촉구했다. 나는 전문가에 의해 묻힐 뻔 했던 5·18 암매장의 진실을 담배필터 추적으로 되살려 낸 것에 기자로서 큰 자부심을 느꼈다. 소중한 제보를 해주고 곤욕을 치른 김씨의 진실을 지켜낸 것이 가슴 뿌듯했다. 몇 년후 부엉산 유골은 여러 명의 법의학 전문가들에 의해 총알과같은 강력한 외부 충격에 생겨난 구멍이라는 감정 결과가 발표됐다. 후배기자들에게 '그래전문가 별 것 아니야'라고 외치고 싶다. 현장기자 시절, "기자가 굳이 전문가일 필요가 있나? 전문가들의 전화번호만 많이 알고 있으면 되지" 누군가 이런 얘기를 하면, 우리는 늘 "그거 참 명답이라"고 즐거워 하면서 기자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전문가의 벽을 뛰어 넘지 않으면 안된다. 기자에겐 전문가들에게 주눅 들지않고, 전문영역도 감시할 막중한 책무가 있다. 국민의 알권리가 전문가의 벽앞에 무너져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광주전남기자협회 16-03-10 조회4138
<사진설명>(상)100번 오르면 두 번 정도 밖에 볼 수 없다는 청명한 하늘 아래 백두산 천지 (하) 좌-천지에 오르기 직전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1천 개의 계단 우-중국과 북한을 경계로 나누는 두만강 다리. 건널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아픔을 대변하는 듯 하다. 백두산 여행기 박인철 광주신세계 기획홍보팀장 영하 40도 뚫고 만난 天池…감동 또 감동 지난 1월말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 아들과 함께 올랐습니다. 온 지구에 빙하기라도 온 듯 최강 한파가 몰아친 날 실온도 영하 32도, 체감온도 영하 40도, 한번도 체감해 보지 못한 추위를 뚫고 2천750m 백두산 정상에 섰습니다. 버스에서 스노모빌로 갈아타고 서파쪽 백두산에 오르는 길은 칼로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싸움이었습니다.(오른쪽 볼에 동상의 상처를 남겼습니다) 매섭도록 차가운 바람이 살갗을 뚫고 들어오는 고통을 이기고 발아래 펼쳐진 구름위에 올라 1천개의 계단을 딛고 눈앞에 펼쳐진 백색의 천지는 말그대로 하늘 위에 호수였습니다. 한민족의 정기가 솟아 오르는 백두산 천지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습니다. 우리땅 북쪽을 통해 한번에 올 수 있는 이곳 백두산, 광주에서 2시간 김해공항으로 버스타고, 김해에서 연변공항까지 2시간 30분 비행기를 타고, 연변에서 백두산 아래 도시인 이도백화까지 4시간 버스를 타고 돌고 돌아 우리는 그렇게 백두산 천지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1천개계단끝하얀세상얼어붙은 장백폭포 장관 다리 하나 사이에 두고건널수없는북녘의땅 생존단어만 나눈 중2 아들호연지기 기른 여행 됐길 100번 오르면 두 번 정도 밖에 볼 수 없다는 천지는 한파를 뚫고 오른 우리의 노고에 답례라도 하는 듯, 서파 북파 연이틀 활짝 열어 젖히며 벅찬 감동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천지물이 떨어지는 60미터 높이의 웅장한 장백폭포는 3분의 1이 얼어 붙어 그 높이를 가늠할 수 없었지만 천상에 오르는 길처럼 멋진 장관이 펼쳐졌습니다. 눈꽃 상고대 설경과 분화구로 뚫고 나오지 못해 뜨거운 지열로 피어오르는 연기는 꿈속을 거닐 듯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마지막 날. 100미터도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중국과 북한을 경계로 나누는 두만강 다리도 파란색 빨간색으로 나뉘어져 국경임을 구분해 줄 뿐 여느 다리와 같았습니다. 먼거리 돌아 여기까지 왔는데 불과 다리 하나 사이에 두고 건널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설움을 대변하고 싶은 마음에 북한 땅을 줌으로 당기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습니다.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에 연변 박물관에 들렀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언어와 문화를 지키며살아가는 조선족의 역사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옛고구려 발해가 주름잡고 항일 운동의 근거지로 우리 민족의 주 활동 무대였던 이곳 간도 일대에 조선족 농악무가 널리 분포돼 있는 지도를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남의 땅이된 우리의 옛 영토는 같은 민족, 같은 언어, 같은 전통으로 아직도 지도에 발해 땅 만큼의 우리의 문화적 영토로 남아 있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지금은 남의 땅에서 우리 한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계승하며 민족의 정체성을 처절히 지켜나가는 그들의 노력과 애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와 같은 민족 연변일대 조선족을 하나의 뿌리로 이해하고 통일 조국의 힘있는 미래에는 대륙으로 뻗어나가며 함께 손을 잡아야 할 우리의 또 하나의 민족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선말을 가르치지만 조선의 역사를 가르칠 수 없다는 연변 가이드의 말이 아픔으로 다가왔습니다. 여행 내내 몇 마디 생존단어 외에는 문장이라고 표현할 정도의 긴말이 없는 중2 질풍노도기 아들놈이 뭔 생각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들과 둘이 동행한 여행을 통해 부자간의 정을 느끼는 소중한 시간이자 백두산 정기를 받으며 스스로 호연지기를 기르고 뭔가 느낄 수 있었던 여행이 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함께 동반한, 지금은 현역에서 은퇴하신 선배님들. 몇 십년 동안 산을 오르며 맺은 인연으로 20여년 만에 다시 백두산을 찾아 감회에 젖으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몸소 증명해 보이신 건강하신 모습들 나이들어서도 함께 어울리며 배려와 진한 우정을 나누는 선배님들의 멋진 삶도 이번 여행의 또 하나의 배움이었습니다. 유익한 3박 4일 하얀 눈세상 백두산 여행을 정리하는 동안 하얀 눈으로 뒤덮힌 설국 광주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광주전남기자협회 16-03-10 조회3465
<사진설명>KBC광주방송에서 지난 2002년 정몽준 국민통합21 대선후보를 초청해 토론회를 하고 있다. [되돌아 본 나의 기자생활] 신선호 동신대 초빙교수·전 KBC 광주방송 보도국장 신선호교수는·여수문화방송(MBC) 보도국 취재기자·광주방송(KBC) 보도국장, 동부방송본부장·광주시청자미디어센터장·광주전남기자협회 부회장·한국청소년영상제 심사위원장·동신대학교 방송연예과 초빙교수 ·현)광주전남 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현)‘시민플랫폼 나들‘ 나들학교장·현)광주전남언론학회 기획이사 지역공동체 한걸음 진보에 함께해 즐거워 기자로 살았다. ‘네가 기자냐?’ 숱하게 자문하며 그렇게 방송기자로 내 인생 앞자락을 달렸다. 대학시절 학내신문 기자로 활동한 것을 시작으로 여수MBC 10년을, 그리고 다시 KBC(광주방송) 14년을 기자로 살았다. 그 24년, 방송인생의 전반부가 기자로서 공급자 역할이었다면 이후 광주시청자미디어센터 4년여 생활은 완벽하게 수용자의 입장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였다. 방송교육과 제작지원 등으로 시민 시청자들을 그동안의 소극적, 무비판적 수용자에서 능동적 이용자, 생비자(프로슈머)로 바로 설 수 있도록 지원하는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이젠 대학에서 신문방송학 강의를 하는 한편 광주전남 민주언론시민연합 등 시민단체에서 시민주체의 마을공동체 활성화운동과 시민기자 교육, 마을미디어 지원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렇게 나는 여전히 방송미디어 안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지난 시간 많은 부분 나는 기자로서 행복했다. 대학시절 하고 싶었던 일로서 꿈을 이루고 살았으니 무엇보다 그러하다. 현장기자로서 또는 줄곧 뉴스앵커로서, 시사토론 진행자로서 현장을 취재 보도하거나 지역현안에 대한 특집제작과 토론을 이끌며 선후배 동료들과 기쁨과 보람을 함께 할 수 있었으니 더욱 그렇다. 나의 꿈과 작은 노력으로 우리 지역공동체의 한걸음 진보에도 기여할 수 있었다며 내심으로나마 자부할 수 있으니 참 감사한 일이다. 다시 돌아보면, 방송사 기자생활은 90년대 초반까지는 권력과, 90년대 중반 이후는 자본의 민낯과 맞닥뜨리는 시절이었다. 1980년대, 방송마다 ‘땡전뉴스’로 ‘전비어천가’를 불러댈 때 박종철, 이한열 등 수많은 청년 대학생들의 희생이 이어졌으며 이른바 노태우 6.29선언을 이끌어낸 1987년 6월 항쟁 속에서 기자들은 무임승차라는 자괴감을 갖고 있었다. 결국 서울 MBC 기자들의 방민추(방송민주화 추진위원회)가 한국방송사상 최초의 노조설립으로 이어졌고 이를 신호탄으로 목포, 여수, 광주 MBC등의 차례로 공정방송을 기치로 내건 노조운동이 시작되었다. 나 역시도 여수MBC 초대노조 위원장으로서 동지들과 함께 징계와 해고에 맞선 단식과 가두홍보, 청와대 낙하산 황선필 사장 퇴진투쟁과 전국 MBC 연대파업 등으로 군부정권과 그 하수인격인 경영진과 싸워야 했다. 역시 갓 출범했으나 해고의 피바람을 견뎌내고 있던 전교조와의 지역단위 연대는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 당시 함께 했던 이들이 여수의 이청연 오병종 박수석 PD 등이었고 광주의 서규순, 오창규, 목포의 나영진, 윤사현, 서울의 정기평, 최용익, 심재철 그리고 우리가 당시 큰형님으로 불렀던 서울신문의 권영길 등이었다. 1988년 2월, 회사쪽의 회유와 협박을 피해 노조설립 신고서를 들고 시청을 찾아갔을 때 당시 노정계장이 “기자가 뭔 노조를 다...” 하며 호기심과 곤혹스러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바라보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방송 노조 설립 주도… '평화의 댐' 보도 부끄러워 그 무렵 1987년 당시 평화의 댐 성금 모금운동에 동원됐던 기억은 나의 기자생활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다. 방송사마다 북한의 금강산댐을 이용한 수공작전으로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며 컴퓨터 그래픽으로 방류수가 63 빌딩 절반 높이까지 들어찬 모습을 보여주는 등 호들갑으로 국민들을 위협하고 범국민적 모금 분위기를 조성했다. 날마다 모금액이 전국 방송사마다 내부적으로 순위가 매겨져 내려왔고 기자들은 취재는 뒷전이고 출입처별로 이른바 평화의 댐 성금 유치경쟁을 벌여야 했다. 거리에서는 중계차를 동원해 모금함을 놓고 기관단체장과 기업체 대표, 어린이, 주부들을 동원해 줄지어선 모금 쇼를 벌이고 한편으로는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코 묻은 돈에서부터 기업체 기관단체, 동네별 통반장까지 찾아다니며 성금의 자사 기탁을 을러대거나 부탁해야 했다. 그리고 불과 1년 후 ‘5공 청문회’에서 평화의 댐 사업은 북한 위협을 정치적으로 과장한 ‘대국민 사기극’이었음이 결론지어졌으니... 당시 출입처의 성금 기탁독려에 소극적이던 내게 누군 하고 싶어 이 짓 하는 줄 아느냐며 강하게 힐난하던 선배는 예나 지금이나 말이 없다. ‘그동안 왜곡, 굴절되어온 방송체제는 전면적으로 고쳐져야 하며 방송의 고유 기능은 시청자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전적으로 방송인에게 맡겨져야 한다 ····· 권력자가 임의로 임명한 관선 임원들의 비민주적 회사 운영과 근로자들의 대응능력의 결여로 오늘날의 방송은 정치권력의 입장을 대변하도록 호도되었다. 결국에는 국민 우중화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당시 MBC 노동조합 창립선언문 가운데 일부이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내용에서 시대적 차이를 거의 느낄 수 없음에 착잡한 마음이다. 마을 속으로 주민 곁으로…마을미디어 '활짝' 김중배 선생은 1991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직을 내던지며 “앞으로 언론은 권력과의 싸움에서 이제 더욱 원천적인 제약 세력인 자본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고 경고했다. 그의 말은 큰 울림으로 예언처럼 곧 현실이 되었다. 방송민주화를 기치로 내걸었던 언론노조들은 대부분 복지노조의 길을 걸었고 기자들도 금융위기 등을 겪으며 자사이기주의로 직업인으로 한없이 작아지며 연대의 틀은 하나 둘 깨져나갔다. 애당초 언론관이랄 것조차 없이 황금알 낳는 거위 정도로 여기며 접근한 자본주들은 모기업이 어려워지면 예외 없이 웃돈 챙겨 방송을 팔아넘기고 떠나갔다. 그 와중에서 기자들은 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희생되어야 했고 남은 이들은 더 깊은 상처와 노동강도에 시달려야 했다. 그것은 최근 광주일보 노조가 낸 회사인수 자본의 성격과 관련한 성명에서 보듯 지금 우리 지역언론의 모습이기도 하다. SNS 뉴스시대, 시민기자 시대, 그리고 다시 뉴스 전성시대라고 한다. 전통적인 매스 미디어에서 디지털 마이 미디어로 그리고 다시 흐름은 마을 미디어로 옮겨지고 있다. 마을민주주의, 시민주체의 일상 속 직접민주주의의 구현에 누구보다 기성 언론이, 전문 기자가 마을주민들과 함께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 이제 마을 속으로, 주민 가운데로, 생활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지역친화 차별화 전략이다. 계절은 또 한 구비 물결쳐가고 있다. 꽃들은 피고지고 햇살은 더욱 촘촘해지겠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씨앗을 손에 들고 새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겠다. 구름이 낮게 내려올수록 새의 노래를 품은 씨앗, 열매 맺는 언어들이 힘 있게 뿌려지기를 응원한다.
광주전남기자협회 15-07-07 조회5041
<사진설명> 1993년, 초모랑마 베이스캠프 가는 길 [되돌아 본 나의 기자생활] 이창수 곡성군청 기획홍보단장, 전 광주일보 논설위원 이창수 단장은 1982년 광주일보 1기 입사 광주일보 정치·경제·사회·문화부장, 뉴미디어 부장 광주일보 논설위원·문화사업국장 곡성군청 기획홍보단장 광주전남 언론인 산으로 이끈 선구자 언젠가 신문에서 읽은 ‘서평(書評)’ 한 대목. “한 대(代)가 업(業)을 지으면 기자를 하고, 2대가 업을 지어 홍보(弘報)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엮은 리얼 스토리라 했다. 그날, 저녁 자리에서 후배에게 던진 한마디. “그래. 3대의 업이 쌓이면 기자 하다가 홍보를 하는 건가? 그게 바로 나지” 흔한 얘기로 우리가 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다. 순간순간의 시간 속에 자신의 생을 사는 의미를 새겨 넣는 행위다. 공인이기도 한 기자는 특히 그렇다. 얼마 전 받은 전화 한 통. 취기가 덜 가신 상태에서 오랜만에 듣게 된 “선배님”이라는 친숙한(?) 호칭이 이 글을 쓰게 한 동인이자 족쇄였다. 고향 집으로 귀촌한 지 어느새 10년 여, ‘정부 미(米)’에 입맛이 길들여진 상태에서 ’나의 기자시절‘ 운운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후배‘에게 엉겁결에 답한 것일지라도 엄연한 약속, 그래서 앞으로 취중 통화는 안 하는 게 상책일 터. '광주일보 1기' 부푼 꿈이자 버거운 짐 오래된 일기장을 넘기듯 지나온 시간들의 아릿한 편린들을 추슬러 본다. 스스로 깨뜨린 유리 병 조각에 손목을 베인 것처럼 아리지만 슬프지는 않다. 기자(記者), 그 때의 상념은 아직도 마저 끝나지 않은 ‘5월’로 시작된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년의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격동의 80년대 초, 광주일보에 입사한 내게 금아(琴兒)의 수필처럼 찬란했던 ‘5월’은 늘 매캐한 최루가스에 덮여 변주되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시대의 성장통으로 다가오곤 했다. 익히 아다시피 광주일보는 민족 전란인 6·25를 겪으며 태동한 ‘전남일보’와 4·19혁명의 씨앗을 품고 싹을 튼 ‘전남매일신문’(최승호 선배님의 ‘광주일보가 나아갈 길’에서 인용)이 신 군부의 체외 수정으로 새롭게 태어난 광주·전남지역 유일의 종합 일간지였다. 그래서 광주일보는 저항과 혁신, 보수와 개혁의 DNA를 공유할 수밖에 없었고, 광주일보의 한 아이콘이기도 했던 ‘수습기자 1기’라는 이름표는 내게 늘 부푼 꿈과 함께 버거운 짐도 마다하지 못하게 하는 주술이었다. 소위 중앙 일간지와 ‘1도(道)1사(社)’ 체제의 지방신문은 물론 방송 3사에 입사한 대한민국의 모든 수습기자들이 ‘5공’ 정부가 주관한 집체교육을 받고, 세칭 ‘기자증(press card)’을 받아 언론의 길에 들어서던 때였다. 1987년 7월, ‘6·29선언’에 따른 ‘6공’ 탄생 과정에서 대통령 후보 인터뷰 일정은 ‘이한열 사망’ 사건으로 연세대 현장 취재로 바뀌었고, 89년 ‘이철규 변사사건’은 ‘부패망(腐敗網)’ 등 새삼스러운 법의학 공부와 현장 재연 등 기자와 스페셜리스트를 넘나드는 곡예까지 마다하지 않게 했었다. 그 때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후배님들께 귀한 지면을 빌려 선임으로서의 독선과 아집을 사과드린다. 에베레스트 등 대자연의 은밀한 오지 탐닉 80년대 어스름, ‘89~90 에베레스트 원정대’라는 나를 미치게 만든 속칭 ‘뽕’을 맞게 된다. 서울과 경남·북에 이어 광주·전남 산악인들이 히말라야 원정길에 나선 것이다. 당시 ‘억대’를 넘는 비용 부담으로 감히 넘보지 못했던 ‘하얀 산’을 향해 ‘광주·전남 학생산악연맹’이 도전의 깃발을 내걸었고, 한국일보의 대한산악연맹 한국 에베레스트원정대 동행취재가 유일무이였던 언론 환경에서 호승심을 주체하지 못한 내게 ‘제3의 극지’로 갈 수 있는 길이 생겨났다. 보이지 않은 공모 형태(편집부국장께서 젊은 기자 3~4명에게 동행취재를 암시하며 각자 준비와 훈련을 권유)로 원정팀에 선발된 이후 네팔 에베레스트와 중국 초모랑마(에베레스트의 중국 명칭), 천산산맥 칸텡그리·포베다 원정, 캄차카 화산지대 탐사 등 한동안 대자연의 은밀한 오지(奧地)를 탐닉하는 열병에 시달려야 했다. 그것은 내게 또 하나의 여정(旅程)이었다. 80년대가 기자로서 인문학·사람과의 대화 노력이었다면 90년대는 생태학·자연과의 만남이었다고나 할까. 어쩌면 ‘사람 앞에 선 기자’와 ‘자연 앞에 선 기자’의 차이, 그리고 자신의 어설픈 민낯을 볼 수 있는 성찰의 시간이었다는 게 더 솔직한 표현이리라. 2004년이 저물 무렵. ‘언론사도 기업’이라는 경영자의 트랙을 벗어나지 못해 ‘백척간두 진일보’라며 행한 귀향. 그리고 군정 홍보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다시 언론과의 교감이 시작됐다. 일전, 매일 아침 뒤적이는 신문들 가운데 지령 20000호 광주일보를 대면했다. 특집을 엮어 낸 선·후배님들의 표정을 행간으로 읽으며, 버릇처럼 지인과의 ’쏘맥 한잔’을 예약한다.
광주전남기자협회 15-06-05 조회3608
되돌아 본 나의 기자생활 이광이 자유언론실천재단 기획위원·전 무등일보 기자 이광이 위원은 -무등일보 기자·노조위원장-전국언론노조 선전국장·편집국장-문화체육관광부 과장-조계종 자성과쇄신결사 국장-자유언론실천재단 기획위원 따뜻한 봄날, 초등학교 운동장. 한 아이가 뛰어가고 있다. 저쪽에서는 새가 한 마리 날아온다. 새는 갑자기 급격한 하강 비행을 시도했다. 먹이를 발견했거나, 천적에게 쫓기는 중이었을까? 둘은 비슷한 높이가 됐다. 마주보고 달리던 아이와 새는 충돌했다. 아이는 한쪽 눈을 실명했다. 아이 가족은 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학교의 책임은 애매하다. 새는 피해를 보상할 능력이 없다. 이 허망하고 비참한 사건을 어찌할까? 20여년 전 지산동 법원에 다니면서 기억에 남는 사건이다. 나는 2사회부 소속 법조2진이었다. 책상에는 ‘우리 군수님’으로 시작되는 지역주재 형님들의 기사봉투가 수북했다. 오전에 국적불명의 언어들을 한글로 바꾸는 일을 마치고, 오후에는 법원에 갔다. 거기 가는 것은 치과에 가는 것만큼이나 싫은 일이다. 법조는 가난한 출입처였다. 점심 사주는 이도 없어 각자 해결하고 온다. 광주지법 한 구석 하꼬방만한 공간에서 1진은 화투 패를 늘어놓고 금일의 일진을 점치고는 했다. 2진은 서넛 무리를 지어 법원과 검찰청을 ‘사쓰마와리(察廻)’ 했다. 법원 수석부장판사실에는 판결문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각 사건마다 거의 책 한권 분량이다. 그것을 나눠 읽는다. 그 더미 속에서 기사거리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판결문은 다이제스트를 제공하지 않는다. 꺼리가 될 성 싶으면 통으로 읽고 메모해야 한다. 수첩을 서로 풀한다. 간혹 검경이 은폐했던 사건이 보석처럼 건져지기도 하지만, 그래서 법원에 특종은 없다. 피해구제, 공공의 금고를 털어라 나는 2년간 법원을 출입했다. 한자투성인 판결문을 의무적으로 읽어야 하는 일은 고역이었다. 시청이나 도청이 가고 싶은 출입처였다. 교육청은 마지막 남은 5공식 출입처라는 얘기를 풍문으로 들었다. 하지만 기자로서 내 근육은 법원에서 컸다. 판결문 안에는 삶의 모서리에서 빚어지는 온갖 사연들의 기승전결이 다 들어 있다. 그런 점에서 하나의 교과서다. 저 아이의 실명사건에 대해 판사는 학교에 관리책임을 물었다. 청구액의 6할을 보상하라고 주문한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도 억울한 측면이 있지만, 피해 구제의 책임은 감당할 수 있는 자에게 지울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다수이고, 기관이다. 나는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거나, 가해자의 무능으로 피해구제가 난감할 때, 공공의 금고를 털어야 한다는 논리를 지산동에서 배웠다. 그것을 어느 정도 비약하면, 우리는 세월호의 해법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법원은 지금 생각하면 낙타의 시간이었다. 니체가 말한 낙타-사자-어린아이를 거치는 3단계 중에 처음 거쳐야 하는 시간. 짐을 싣고 사막을 건너는 낙타처럼, 묵묵히 견디고 습득해야 하는 시간이다. 거기서 이성과 논리의 칼을 벼리고, 자존을 키운 후에 강호에 나가야 한다. 나는 술집에서 자존이 스스로 크는 것으로 믿었다. 목청을 높이고, 주먹으로 탁자를 치고 분노하면서, 사자의 시간에 진입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왕궁의, 저 왕궁의 음탕에는 침묵하면서, 50원짜리 갈비에 왜 이렇게 기름덩어리만 많이 나왔냐고 돼지 같은 주인 년에게 욕을 해대는 김수영처럼, 그것은 술집 문밖에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소음 같은 것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깨달았다. 나는 난파선의 노조위원장이었다 1997년, 거대한 해일이 덮쳤고, 우리는 2년여 비틀거리는 항해를 계속하다, 1999년6월30일 결국 침몰했다. 나는 불행하게도 그 난파선의 노조위원장이었다. 아무도 위원장을 맡으려고 하지 않아, 정말 노조의 간판을 내릴 수 없어 내가 떠맡았던 것인데, 결과는 가혹했다. 당시 무등일보는 20억원이 넘는 임금 퇴직금 채무를 남기고 폐업했다. 돈을 받아내 100여명에게 나눠 지급하는 것이 남겨진 숙제였다. 그것은 운명처럼 다가온 슬프고, 고통스럽고,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민주노총으로부터 4시간 교육을 받은 뒤 갓 꾸려진 한 무리의 시위대를 이끌고, ‘임금지급과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지산동까지 낯설고 두려운 ‘투쟁’의 길을 걸어가던 그 여름날을 잊지 못한다. 그날 이후, 나는 기자의 옷을 벗고, 노조위원장을 무려 5년이나 해야 했다. 우리는 채권의 90% 정도를 받아냈다. 함께 싸운 동지들은 ‘그날이후’라는 모임을 결성했고, 매년 7월 첫 토요일에 만난다. 그것은 사자의 시간이었다. 암울하고 혹독한 세월이었지만, 나는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내가 투철해서가 아니라, 분노가 있었고, 내 이름 뒤로 100여명의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자의 시간 속에서 사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운명이었다. 나는 그렇게 10여년의 짧은 ‘기자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떠났다. 봄부터 소쩍새가 운다. 여름에 천둥이 치더니, 가을에는 무서리가 내린다. 그래야 누님처럼 생긴 꽃 한 송이가 핀다. 꽃은 아득히 돌아온 세월의 뒤안길, ‘어린아이’의 시간에 핀다. 펜이 운명인 사람들, 언제나 선후배라는 이름으로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람들, 우리들 모두 꽃이 되어 만나기를 소망한다. - 이광이 자유언론실천재단 기획위원
광주전남기자협회 15-04-07 조회3704
광주전남기협 운영위 2015년 첫 회의 광주전남기자협회 운영위원들이 1월18일 협회 사무실에서 2015년 제1차 회의를 하고 있다. 이날 운영위원들은 협회 집행부가 보고한 사회공헌 봉사활동, 체육대회, 워크숍, 해외연수 등 2015년 사업계획을 확정했다. 2014년 올해의 기자상 수상자들은 3월3일부터 6일까지 3박4일간 중국 북경으로 연수를 다녀올 예정이다.
광주전남기자협회 15-02-12 조회2067
<사진설명>광주전남기자협회가 지난달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주최한 법원 체험행사에 참가한 언론 회원 자녀들이 형사법정에서 단체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김찬이(설월여고 2년) - 전남일보 김기중 부장 딸 "장래희망 검사, 미래직업 체험소식에 망설임없이 친구 셋과 참여 판사석 앉아 법정보니 마음 설래 꿈 이뤄 다시 법정에 설 날이 오기를" 사건마다 사정이 있고 가슴 아프지만냉정하고 단호하게 법관 위치 지켜라 법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봤지만 항상 지나가면서 바라보기만 했을 뿐, 한 번도 가보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어떻게 하면 갈 수 있는지도 몰랐을 뿐더러, 가봤자 아무것도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운이 좋게도 법원에 가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장래희망이 검사인 나에게 미래의 직업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체험해 볼 수 있다는 소식은 정말로 놀라웠다. 나는 망설임 없이 체험을 신청했다. 친한 친구 3명과 함께 법원 체험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법원 체험 당일, 설레는 마음을 가득 안고 도착한 법원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처음 가본 법원은 생각보다 무서웠다. 함께 체험을 온 아이들은 법원에 대한 첫 느낌이 재미있고 신난다고 이야기했지만 나와 친구들은 '접근 금지구역'에 온 느낌이었고 법의 심판을 받는 곳이니만큼 두려움이 앞섰다. 하지만 천천히 관계자로부터 법원과 우리나라의 사법 제도에 대해 설명, 그리고 사례를 통한 사건별 문답 등으로 얘기가 오고가자 난 법원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법원과 사법제도에 대해 간단한 설명 후 실제 개정중인 법정에 들어가 실제 형사재판과 민사재판을 구경했다. 말로만 듣고, TV에서나 보던 재판을 실제로 보니 일단 신기했다. 사기 등의 범죄를 먼 세상 이야기, 드라마 속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가까운 사람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고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사정이 있는 것 같고 가슴이 아프고 하지만 단호한 검사님과 판사님을 보면서 법관의 위치가 얼마나 무겁고 힘든 자리인지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실제 재판들을 구경한 후에는 직접 자신이 뽑은 역할을 가지고 모의재판을 해보았다. 슬프게도 나는 '우배석' 역할을 뽑아서 대사가 없는 역이었지만 실제 판사석에 앉아 법정을 바라보니 감회가 새로웠고 마음도 설레었다. 또한 열심히 하는 친구들과 어린 아이들을 보면서 실제 재판의 모습을 상상해보고 경험해 볼 수 있었다. 미래에 내가 꿈을 이루어 법정에 설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모든 체험이 끝나고, 기념사진을 촬영한 후에는 판사님과 직접 대면해 몇가지 질문들을 할 수 있었다. 검사, 판사, 변호사의 다른점부터 판사가 될 수 있는 방법 등 평소에 궁금했지만 딱히 알 수 없었던 점들에 대해서 솔직하게 질문할 수 있었다. 항상 상상만 했던 법원에 가서 친구들과의 추억도 쌓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참 좋았던 시간이었다. 멀게만 느껴졌던 법원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시간이었고, '법원에 오고 싶으면 언제든 와도 된다'는 답을 얻었으니 언제 또 기회가 되면 다시 가보고 싶다.
광주전남기자협회 15-02-12 조회4361
<사진설명> 김정호 이사장이 지난해 12월 18일 광주전남기자협회 올해의 기자상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수상한 뒤 구길용 회장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되돌아 본 나의 기자생활 김정호 향토문화진흥원 이사장(전 무등일보 편집국장) 김정호 이사장은 -전남일보 업무국 보급부장(부국장)-광주일보 향토문화연구소장·논설위원 겸 편집위원-무등일보 편집국장·기획실장-전라남도 영산호관관농업박물관장-문화관광부 21세기문화정책위원회 위원-현)향토문화진흥원 이사장 기자는 글을 쓰고, 그 글은 사회에 유익해야 진도에서도 읍에서 30리 거리의 ‘뱀골’이라 부르는 작은 동네에서 태어난 촌놈이라 기자라는 직업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상무대 안에 있던 육군항공학교에서 5·18을 겪으며 만기제대를 한 뒤 당시 신분상승의 유일한 창구라 할 수 있는 고시준비를 했다. 지산동 딸기밭 농막에 앉아 육법전서를 외워갔지만 응시에 자신을 갖기까지는 최소한 4년 세월은 버텨야 할 것 같았다. 자유당 말기 시골 군부에도 지국장들이 기자행세를 하던 때가 있었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언론계 정풍 바람이 불어 급료를 지급하지 않는 시·군부 보급소장들(당시 직함은 지국장)의 취재가 금지되었다. 당시에는 신문 보급을 위해 시급지사나 지국장이 임명한 지방 기자들이 있었으나 본사에서 급료가 나가지 않는 기자는 모두 정리했다. 63년 중앙일간지들이 기존의 지사 기자와 구별하기 위한 방편으로 지방특파원이란 이름의 주재기자를 공모했다. 그래서 조선일보 주재기자 공모에 응시해 합격하면서 내 인생이 결정되었다. 2개월간 서울에서 수습교육을 받은 뒤 광주지사에 배치되어 이미 기자로 근무 중이던 고인이 되신 최계원(광주시립박물관장)씨의 조수 겸 수습기자 생활을 했다. 당시 주재기자는 광주에 2명, 목포, 여수, 순천에 각 1명씩 5명으로, 이들이 전남판이란 지방판을 담당했다. 지방판에는 15건 내외의 기사가 실려 하루 3건 이상의 기사를 철도편으로 본사에 송고했다. 물론 급한 기사는 전화로 송고하고 사진은 전신전화국에 가서 전송하던 시절이다. 이 때 수석기자인 최계원씨는 도청과 정치를 맡고 나머지 기관은 모조리 내 담당으로 경찰국, 경찰서, 검찰청 등 주로 사건담당기자였다. "지역전문가 되겠다" 중앙지서 지방지로 68년 삼성이 중앙일보를 창간하면서 중앙일보에 발탁되었으나 서울에 가서 임명장만 받고 내려와 곧 사표를 제출했다. 광주에서 이동없이 계속 근무해야했던 신분이었던 데다 취재반장인 최계원씨가 이동하지 않는 한 평생 경찰출입기자로 인생을 마감할 것 같은 회의에 빠져 있었다. 본사에서 1년 이내에 최계원씨를 지사장으로 위촉하고 취재반장을 넘겨주겠다는 본사의 설득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다 이듬해가 되어도 변화가 없더니 본사근무로 발령이 났다. 당시 치안부는 사회부차장이 출입하고 그 밑에 7명의 기자를 배치, 각 경찰서를 출입시키던 시절인데 내게 종로서를 출입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시골에서 사건기자로 능력을 발휘했더라도 시골티를 벗으려면 경찰을 나가면서 서울분위기를 익혀야 된다는 것이었다. 사건기자에 신물이 나서 조선일보를 그만두려 했는데 본사에서 다시 수습과정을 거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시는 주재기자 그룹에서는 몸값이 있던 때라 그만 시골로 내려가겠다고 했더니 지방부에 배치, 경기판 담당을 보도록 해주었다. 광주지사가 정리되면 최계원씨를 지사장에 임명하고 나를 취재 반장으로 보내기 위한 포석이었으나 최기자가 선뜻 광주지사장을 수락하지 않아 곧 사표를 제출하고 광주로 돌아왔다. 그래서 69년 입사한 곳이 전남일보 사회부 차장이었다. 당시 전주출신 이규태씨가 조선일보 사회부 차장을 거쳐 조사부장이 된 뒤 개화백경을 연재하고 있었다. 그는 내게 지방대 출신이면서 전라도 출신으로는 조선일보에서 직장 생활은 되겠지만 언론인으로 뜻을 펴기는 어려울 것이니 차라리 시골에 내려가서 뜻을 펴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충고해주었다. 지방지로 옮기는 결단을 내리면서 많이 고뇌했다. 지방에서 신문사 편집국장이 된들 지역사회에 무슨 공헌을 할 것이며 그 이후에는 무엇을 하고 지낼 것인가 생각할수록 막막했다. 조선일보 조사부에서 묵묵히 앉아 근현대사자료를 모아 한국학의 전문가대열에 들어선 이규태씨가 생각났다. 비록 시골 신문기자가라 하더라도 지역특성에 대한 전문가가 되면 살길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전설의 현장' 3년간 200회 연재 전남일보 전입 후 1년 만에 섬취재에 나섰다. 법성포에서 출발해 경남 남해도까지 2개월간 섬과 섬을 돌고 돌아 『섬·섬사람』이란 제목으로 50회를 연재해 72년 ‘한국신문상’을 탔다. 73년에는 ‘민속의 향기’ 30회를 연재하고 75년부터 3년간에 ‘전설의 현장’ 200회를 연재했다. 78년 중앙국립박물관에 시작한 박물관대학 1기생으로 등록해 1년간 50강좌를 받은 뒤 신문사 안에 향토문화연구소를 개설해 간사를 맡았다. 80년 전남매일과 통합되어 광주일보가 되면서 조사부장 겸 전일도서관장, 향토문화연구소장 등을 맡아 이듬해 1월부터 2년간 역사 현장을 찾는 ‘옛터’란 제목의 연재물을 133회 연재했다. 이 연재를 끝내고 83, 84년 두 해에는 ‘전남성씨고(全南姓氏考)’, ‘전남의 토박이’를 연재했다. 편집국을 떠나 있으면서도 단독연재의 특집을 계속했다. 88년 무등일보 창간 편집국장을 맡아 89년과 90년 ‘세계의 다도회’, ‘중국산동반도역사기행’, ‘청해진’ 등을 연재했다. 91년 무등일보를 그만두고 금호문화에 ‘한양 2천리’를 2년간 연재했다. 아직도 나는 무등일보에 매주 ‘광주역사산책’을 1회에 20매씩 기고하고 있다. 기자란 ‘글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이 옳다면 나는 아직도 기자이다. 신문잡지류에 기고한 글만 모아낸 책이 45권을 넘어섰다. 인기 없는 책들이라 인쇄비만 들인 셈이지만 이 분야에 관심을 갖는 후배에게는 도움이 될 때가 있으리라 믿어 뿌려왔다. 모름지기 기자는 글을 써야하고 그 글은 사회에 유익해야 한다. 나의 부끄러운 기자 생활의 발자취가 후배기자들의 전문화에 도움이 되었으면 다행이겠다.
광주전남기자협회 15-02-12 조회4105
<사진 설명(상)>이집트 취재여행. 사하라 사막 입구에서 남생 처음 낙타 여행을 하기 위해 준비중.<사진 설명(하)> 동아일보 장철호(작고,뒷쪽), 경향신문 정건조 선배(앞), 광주일보 장준호 기자 등. 전남도청 출입 기자들의 나들이 버스. 되돌아본 나의 기자생활…조일근 전 남도일보 편집국장 조일근 전 편집국장은 전남매일신문 기자중앙일보·무등일보 차장광주매일신문·광남일보 부장·논설위원광주타임스(현 남도일보) 편집국장광주광역시체육회 상임부회장 (사)영광문학기념사업회 회장(현) 치열하고 거칠었던 세월, 신문의 새로운 길 모색 신문 기자가 꿈이었다. 이루었다. 치열하고 거친 세월이었다. 유신 말기인 76년에 시작, 박 정권 몰락, 5·18, 강제 퇴직, 8년만의 복귀라는 이력서가 대변한다. 부끄러운 이력서를 마저 공개한다. 전남매일신문·중앙일보·무등일보·광주매일신문·광남일보를 거쳐 광주타임스(현 남도일보)까지다. 무려 6개사를 전전 했으니 내가 생각해도 한심하다. 언론 관련 세미나에서 질문을 받았다. 직급을 올리기 위해서냐고. 단호하게 부정했다. ‘신문다운 신문’을 만들어보겠다는 욕심 때문이라고. 변명이 아니다. 다시 기자를 하겠다고 처자식 호강 시켜줄 수 있는 일을 접었다. 역경에 처한 선배를 돕겠다는 무등일보를 택했다. 후배가 부장인데 차장을 고집했다. 수습기자 교육에 온 정열을 바쳤다. 신문다운 신문을 만들고자 하는 의욕이 그만큼 강했다. 광주매일·광주타임즈 창간 회사가 몹시 흔들렸다. 후배들의 장래도 걱정됐다. 금광기업 고제철 회장의 장남 고경주 군과 ‘새로운 신문’ 창간에 합의했다. 김원욱 선배와 이영진·최웅일 등 4명이 6개월여 매일 밤새며 상의했다. 고 회장의 결심을 끌어냈다. 회사 신축 부지까지 결정, 창간 준비에 박차를 가하던 중 위기를 맞았다. 고 회장께서 광주일보 김종태, 금호그룹 박정구 회장으로부터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을 받았다. 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추대할 테니 신문 창간을 중단하라는 내용이다. 고 회장께서 약간 흔들렸다. 우여곡절 끝에 고 회장은 상의 회장에 올랐다. 물론 신문도 예정대로 창간됐다. 광주매일에서 고집스럽게 ‘신문의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7년. 지쳤다. 광남일보로 피난(?) 갔다. 광남일보 창업주는 가든 백화점 이화성 회장이다. 이 회장은 송원학원 인수를 싸고 고 회장과 감정이 좋지 않았다. 고 회장이 신문을 창간하자 경쟁심에서 창간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사장 신용호, 주필 윤재걸, 편집국장 정태열 등을 영입했다. 기존 신문사에 비해 손색없는 진용이다. 내 집에서 살다 셋방살이 하는 기분이었다. 1년도 지나지 않아 IMF로 정리해고 됐다. 이틀만인가? 신문 창간을 추진하던 대지건설 정윤삼 회장을 만났다. 김성의(현 남도일보 편집국장)이 다리를 놓았다. 평소 생각하던 새로운 형태의 신문을 제안했다. 뉴스와 생활광고(줄광고)를 무료로 배포하는 타블로이드 판형의 종합일간지다. ‘광주타임스’라는 제호까지를 정 회장은 즉석에서 수락했다. 모든 권한을 위임 받아 창간 준비에 나섰다. 편집국 규모가 100명 안팎이던 기존 신문과 달리 30명으로 꾸렸다. 교열부와 전산실을 없앴다. 광주타임스의 창간 소문이 꽤 났다. 서울 유수의 신문사 기획실에서 문의가 쇄도했다. 종이 신문의 위기를 예감, 활로를 모색하느라 관심을 보인 것이라 생각한다. 시사저널은 나를 인터뷰해 3개면에 걸쳐 ‘새 신문’을 소개했다. 창간과 함께 폭발적(?) 반향을 일으켰다. 생활광고 시장 점유는 예상대로 만만치 않았다. 내심 손익 분기점을 3년으로 잡았다. 적자가 해를 넘기자 정 회장과 박 성호 사장이 새로운 시도를 포기했다. 다른 신문과 다름없는 신문으로 방향을 틀었다. ‘신문다운 신문’ ‘새로운 신문’에 대한 나의 꿈도 깨졌다. 열정도 식었다. 더 이상 신문에 몸담을 이유를 찾지 못했다. 변신을 시도했다. 정치에도 뽀짝거렸다. 3년간 체육회 일도 했다. 사업 유혹에 빠져 쫄딱 망하기도 했다. 신문난립 책임 통감…후배들께 미안 광주타임스 창간 이후 광주의 신문 시장은 극도로 악화됐다. 광주·전남·무등·광주매일·광남 등 기자협회 가입사만도 5개사다. 3개사 정도면 겨우 수지를 맞출 수 있다고 들었다. 이들 5개사 외에 전남매일까지 있으니 줄줄이 적자를 면치 못했다. 생활광고를 주 수입원으로 택했다고는 하나 광주타임스도 신문 시장 상황을 악화 시키는 요인이 됐다. 90년대 이후 광주에는 20개 안팎의 종합일간지가 부침을 거듭하며 발행되고 있어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광주에 이처럼 많은 신문이 태어날 수 있는 토양을 만든 데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 광주매일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광남일보가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광주타임스도 마찬가지다. 그랬다면 오늘날 광주에 이처럼 많은 신문이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금치 못한다. 모든 신문사의 경영이 어려운 실정이다. 후배 기자들이 충분한 급료를 받지 못해 어렵게 살아가는 것으로 안다. 나 때문인 것 같아 대단히 미안하다. 광주 언론의 중추요 역사인 광주일보마저 경영난을 겪고 있다니 죄책감이 든다. 志士精神으로 무장해야 기자협회의 협회보 발행에 작은 위안을 받는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발전을 멈추지 않는 모습을 보여줘서다. 광주·전남의 후배 기자들에게 바란다. 과거 우리 지역의 신문은 부산·대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높은 수준이었다. 기자의 자질도 그만큼 높았다. 자부심을 갖고 임하길 간절히 당부한다. 월급이 적다며 어깨를 움츠리려거든 잡아 치워라. 기자를 하면서 돈을 많이 벌기는 틀렸다. 하루라도 빨리 돈벌이가 되는 직업을 찾아라. 기자를 계속하려거든 지사정신(志士精神)으로 무장하라. 월급쟁이 직업인이라는 인식은 역사가 그리 오래지 않다. 작은 대문으로 구부리고 들어가는 살림이었어도 벼슬아치들에게 결코 숙이지 않는 선배들을 보았다. 존경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른다고 욕하지 말라. 나는 지금도 스스로를 기자로 여기며 산다. 대통령이나 재벌과도 마주앉아 인터뷰 할 수 있다. 거지나 도둑과도 함께 잠잘 수 있다. 어린이처럼 매사에 호기심이 많은 기자. 멋있지 않은가!
광주전남기자협회 15-01-06 조회5284 댓글1
<사진설명> 1. 무등산 개방 때 지왕봉 아래서 폼을 잡았다. 최근 허리수술후 재활중이어서 등산을 쉬고 있다.2. 조선일보 광주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김대중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는 필자.3. 86년 전석홍 지사 방미 수행단과 기념촬영. 되돌아 본 나의 기자생활 조광흠(전 조선일보 호남취재본부장·연합통신 기자) 조광흠 본부장은 한국일보 광주·여수 주재기자 조선일보 광주 주재기자 연합통신 기자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차장 조선일보 호남취재본부장 곁눈질과 헛발질로 시작한 기자생활 30년 1974년 1월 3일 신년 시무식은 숙명의 시작이었다. 한국일보 견습기자 공채 29기로 뽑혀 29명의 동기들과 함께 서울 안국동 본사에서 수습에 들어갔다. 곁눈질과 헛발질로 기자질을 익히고, 3개월만에 광주에 부임했다. 때는 기본적인 기자직 수행보다 직전 발령된 긴급조치 9호에 따른 취재 보도 요령과 주의점 숙지가 더 급했던 시절이었다. 이상문, 박희서, 이준박 선배 밑에서 기사를 익혔다. 75년 기자로서 안목을 넓히고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여수에 부임해 홀로서기를 하던 중 큰 사건을 만난 것이다. 다름아닌 여수 밀수 폭력사건. 대검 특수부 김병리 과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특별수사팀이 여수에 들어와 수사에 나선 것. 운좋게 낌새를 알아채고 본사에 알린 것이 1면톱 대특종으로 이어졌다. 1개월 이상을 현지에 체류하며 허봉용 등 3개파 밀수조직과 경찰서장, 정보부 출장소장 등 비호세력들을 줄줄이 구속한 지역 초미의 사건이었다. 1보가 나간 날 정보부 출장소에 임의동행돼 진술서를 강요받았다. 도중 모처에서 걸려온 전화 덕에 바로 풀려났다. 대통령 특명 수사이니 기자를 건드리지 말라는 전갈이었다. 얼마후 진술서를 강요한 출장소장은 이 사건과 연루돼 구속됐다. 무등산 입석·서석대 시민 품으로 이 사건 취재가 계기가 돼 다른 생을 살게 된다. 조선일보 최계원 지사장과 박래명 선배의 부름을 받았다. 마침 조선일보 광주지사에서 기자 한명을 모집 중이니 올 수 있냐는 것이었다. 객지 생활도 그렇고 자칫 조두흠(당시 한국일보 주일특파원) 형님에게 누를 끼치지 않을까하는 기우, 홀로 커보고 싶은 자부심 등이 복합 작용해 결심을 굳혔다. 사표 제출 후 장기영 사장께서 직접 전화해 만류했고, 형님까지 국제전화를 주셨으나 고집을 꺽지 못했다. 이렇게 조선일보 기자 생활이 시작됐다. 내 인생의 피와 살이 되었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모먼트가 된 것. 조선일보는 그무렵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듭, 일등신문이 되었고, 처우도 크게 개선됐다. 평범한 월급쟁이로 굳어가는 즈음 기자로서, 시민으로서, 국민으로서 절대 잊을 수 없는 5.18을 맞았다. 일반 통신수단이 절단된 상태에서 경찰국장 관사 등지에서의 경비전화를 이용해 서울시경 캡에게 실시간 상황을 알렸고, 인맥을 활용, 전화국내 설치된 청와대 직통회로를 이용해 본사와 통화를 계속했다. 당시 사정으로 보도는 안됐어도 광주의 비상상황을 데스크에 알린 공으로 기자생활 2번째의 1급 특종상을 수상했다. 외견상 평온을 찾아가는 시내 표정과는 달리 언론계에 태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이른바 언론 통폐합. 중암지 주재기자제는 폐지되고, 지방사는 1도 1사, 방송사는 KBS로 통합 등등. 자고 나면 파리 목숨처럼 해직을 당하는 선배들. 이런 과정에 기존 합동, 동양통신을 통합해 발족한 연합통신만이 지방기자를 둘 수 있게 했다. 중앙지 중에서 선택(?)된 기자들로 연합통신 광주지사가 발족했다. 편치않은 마음으로 전직을 했다. 민주화 바람이 일기까지 7년여 세월을 전일빌딩 9층 연통 사옥에서 그렇게 보냈다. 연합통신에서의 보람은 김성진 사장이 수여한 최다 전재상을 고급만년필과 함께 수상한 일이다. 이때 술 잘 마시며 입담도 걸다해 ‘조포’라는 애칭을 얻었다. 술 잘 마시며 입담 걸다해 '조포' 애칭 87년 언론계에도 민주화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강제 통폐합 이전으로 원상 복귀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었다. 나도 친정 조선일보의 부름을 받았다. 연통에 갔다 복귀한 4명의 동료들을 ‘돌아온 4총사’란 애칭으로 회사는 따뜻이 맞아줬다. 홀로 주재하며 광주와 전남·북까지 커버하는 힘에 부친 생활이었지만 맘만은 편했다. 군사기밀보호법이 느슨해진 때에 맞춰 무등산 입석·서석대를 시민품에 돌려달라는 첫 보도는 지금도 흐뭇하다. 88년 도지사 공관 지방청와대 집기 은폐사건은 생애 3번째 큰 특종. 문창수 전남지사가 지방 대통령 전용시설에 대한 국회 초유의 국정조사팀의 방문 전날 밤 공관내 호화집기를 은폐시킨 사건으로 결국 지사가 낙마한 사건이었다. 사실을 그대로 밝혔으면 퇴임까지는 안 갈 사건이었는데 말바꾸기를 계속해 여론의 질타를 피해 가지 못한 것 같다. 이 때쯤 컴퓨터 붐과 함께 신문 제작환경에도 큰 바람이 불어왔다. 조선일보는 CTS(컴퓨터제작시스템) 체제로 전환, 각 기자에게 노트북과 함께 디지털카메라, 휴대폰 등을 지급했다. 더불어 지방 취재망을 대폭 보강, 2~3개 시도를 커버하는 지방취재본부를 가동했다. 언론사상 중앙지로서는 처음으로 발족한 호남취재본부는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며 후배들이 열심히 뛰고 있어 흐뭇하다. 적은 인원으로 매일 10단 1개면과 매주 지방색션을 발행하는 격무였다. 6~7명이 취재하고 쓰는 일 외에 편집 조판까지를 현지에서 해냈다. 취재본부 선임기자에서 차장, 본부장까지 역임하며 기자생활의 꽃을 피웠다. 지방기자로서 접해 보기 힘들던 편집에 대한 외경심도 접을 수 있었고, 지면을 의지대로 꾸려보는 재미는 옛날 기자시절과는 다른 차원의 맛이 있었다. 만 30년 기자생활을 마감하고 정년을 앞둔 2003년 회사는 뒷자리로 호남광고지사장직을 맡겨줘 8년여 언론계 밥을 더 먹을 수 있었다. 날로 척박해지는 언론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후배들 앞에 혼자 행운을 누리고 잘 난 척한 것 같아 송구스럽기만하다.
광주전남기자협회 14-12-09 조회5044
<사진설명 상> 오늘은 마음껏 스트레스 풉시다 구길용 광주전남기자협회장이 개회식에서 “회원간 우의를 다지고 마음껏 스트레스를 풀자”며 개회사를 하고 있다. <사진설명 하> 최고의 경품(?) 연합뉴스 광주전남본부 손상원 기자가 두 아들을 카트에 싣고 이동하는 모습이 눈길을 끌고 있다.
광주전남기자협회 14-11-12 조회2329
<사진설명>2012년 봄, 프랑스 파리 에펠탑 앞에서 2015 광주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시민응원을 펼치고 있다. 되돌아 본 나의 기자생활 김 원 자전 광남일보 편집국장·호남대학교 초빙교수 김원자 교수는 광주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광주일보(구 전남일보)기자로 언론계에 들어와 전남일보에서 부장, 광남일보에서 편집국장, 논설실장을 지냈다. 2002년부터 호남대학교 초빙교수로 지역문화에 대한 강의를 하고 프리랜서 작가로 신문과 잡지에 남도지역의 역사와 인문, 사람들 이야기를 쓰고 있다. 저서로는 문화평론 『이제 삶의 문화를 이야기하자』(2002), 『모바일혁명』(2007)이 있으며, 칼럼집『화살과 노래』(2004), 소설 『환율천재가 된 홍대리』(2010), 에세이집 『보길도 기행』(2014)을 펴냈다. 내가 대학 졸업을 하고 가진 첫 직업은 8년 전에 졸업한 초등학교 교사였다. 교육대학교를 졸업했으니 당연한 일. 그런데 왜 하필 모교로 발령이 떨어져 버렸을까. 집에서 보면 들판 하나를 건너 빤히 바라보이는 학교와 들판은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고, 내 눈에는 정체된 공간으로만 보일뿐이었다. 모든 일이 아버지의 공작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일본에서의 징용생활과 6·25전쟁을 겪은 아버지의 사고 속에는 가족은 항상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 특히 딸에게 타지생활이란 늘 불안의 요소였기 때문에 교육청에 입김을 넣어 고향집으로 다시 끌어들여버린 것이었다. 학교라는 직장은, 특히 할머니와 부모님이 계신 내 집에서의 직장생활은 참으로 안온했지만 내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편안하게 살려고 기를 쓰고 그 공부를 했더란 말인가. 세상이란 물살은 얼마나 멋지고 바쁘게 돌아가는데 나는 한걸음 비껴선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자 그 생각은 바이러스처럼 내 몸에 파고들어 자나 깨나 학교를 그만 둘 궁리만 하게 됐다. 그 후 학교를 떠나 뉴스라는 세파를 몸으로 겪는 언론계에 들어와서 나는, 아버지가 생전에 예언했던 ‘아스팔트길을 버리고 자갈길을 택한 벌’을 톡톡하게 받으며 살았다. 어느 때는 세상과의 갈등이 있었고, 직장에서는 앞날이 보장되지 않는 불안과 내가 가진 능력에 대한 회의가 몰아칠 때도 많았다. 아스팔트길 버리고 자갈길 택해 55세 정년퇴직. 미련도 후회도 없었다. “내가 택한 길 위에서 최선을 다했느냐, 얼렁뚱땅 시간만 메꾸었느냐”는 질문 앞에 그래도 최소한 나는 “옆길을 훔쳐보지 않으며 언론인으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는 걸로 위안을 삼으려고 한다. 퇴직하면서 ‘인쇄물로 기록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세 권의 책을 펴내게 되었다. ‘모바일혁명’, ‘환율천재가 된 홍대리’, ‘보길도기행’ 등 세권 모두 다른 분야의 책이다. 사람들이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헷갈려한다. 오지랖이 넓은 것이냐고 묻는다. 아니다. 나는 그냥 세상사에 아직도 호기심이 많은 전직기자일 뿐이다. 기자는 전방위형 인간이어야한다고 생각한다. 한 분야를 2년 정도 취재를 하면 책을 펴낼 수 있다. 보길도 여행 중 만난 보길면 면장과 식사를 하면서 그의 고민을 들었다. 보길도 관광이 최근에 청산도에 밀리고, 관광을 오더라라도 잘 뚫린 보길대교를 통해 차로 쌩하게 왔다가 쓰레기만 남기고 돌아가 버린다는 것이었다. “보길도를 더 잘 홍보하고 싶다”는 그의 고민을 풀어주려고 기획한 책이 올해에 펴낸 ‘보길도기행’이다. 단순한 정보책자가 아니고 전적으로 나의 주관이 섞인 에세이다. 그래서 김나흔이란 필명을 지었다. 김나흔이란 이름으로 나는 객관성이 떨어지더라도 더 자유로운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비로소 나의 독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 한국관광공사로부터는 책을 기반으로 보길도관광을 업그레이드할 인문관광프로젝트를 받았다. 보길도서 보길도 프로젝트 실천 그래서 지난 8월 이후 보길도에 들어와 아주 살면서 일본 나오시마 섬의 ‘이에 프로젝트’를 벤치마킹한 힐링하우스 ‘비파원’프로젝트를 실천하고 있다. 한 시인이 7년째 비워둔 흙집, 돌집을 수리해 시와 음악과 그림이 있는 풍경을 만들려고 한다. 세연정과 직통하는 오솔길도 만들 것이다. 내가 필명을 하나 만들고 싶다고 하자 역술인 친구가 지어준 이름이 ‘나흔( )’이다.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칼로 나무를 쳐 앞길을 불을 밝히듯 환하게 하다”란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름에 칼도(刀)획도 들어있다. 새로 지은 이름 탓인지 올 여름 보길도에 들어와서 실컷 낫과 호미를 들고 살았다. 7년째 비워둔 집이라서 칡넝쿨이 인도네시아 오지 밀림처럼 얽혀버린 집이었다. 평생 한 것보다 더 많은 노동력을 삼킨 집이 점점 꼴을 드러내고 있다. 칡넝쿨 밑에서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있던 차나무가 잎사귀에 윤을 내더니 요즘은 하얀 차꽃을 예쁘게 피워내고 있다. 뜰에 여러 그루의 비파나무가 있어 ‘비파원’이라는 이름도 그 때 지었다. 갑자기 풀숲 속에서 돌집 지붕이 드러나고 불이 켜지자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도 한 번씩 들여다보며 묻는다. “집이는 여그 뭐 하러 왔소? 나는 그냥 살으라 해도 못 살것그만?” 나도 그게 궁금하다. 이 나이에 나는 왜 보길도에 들어와 손과 발에 가시를 찔리며 모기와 싸우고 있는가? 관광공사의 프로젝트 때문이라면 구태여 이곳까지 오지 않더라도 광주에서 사무실을 하나 내고 컨설팅을 하는 컨셉으로 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관광’이라는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에 있고 싶다. 다시 돌아가신 아버지의 말씀이 들린다. “너는 왜 아스팔트길을 버리고 자갈길을 가려고 하느냐?” 비명에 간 모 대통령의 말을 빌려 “운명이다”라고나 할까? 사람은 누구나 두 개의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에 한 길을 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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