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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 본 나의 기자생활-김원자(전 광남일보 편집국장·호남대학교 초빙교수)

작성자 : 광주전남기자협회 (211.198.190.***)

조회 : 4,984 / 등록일 : 14-11-12 16:20


<사진설명>2012년 봄, 프랑스 파리 에펠탑 앞에서  

2015 광주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시민응원을 펼치고 있다.
 

 

되돌아 본 나의 기자생활

 

김 원 자
전 광남일보 편집국장·호남대학교 초빙교수

 

 

김원자 교수는

광주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광주일보(구 전남일보)기자로 언론계에 들어와 전남일보에서 부장, 광남일보에서 편집국장, 논설실장을 지냈다.
2002년부터 호남대학교 초빙교수로 지역문화에 대한 강의를 하고 프리랜서 작가로 신문과 잡지에 남도지역의 역사와 인문, 사람들 이야기를 쓰고 있다.
저서로는 문화평론 『이제 삶의 문화를 이야기하자』(2002), 『모바일혁명』(2007)이 있으며, 칼럼집『화살과 노래』(2004), 소설 『환율천재가 된 홍대리』(2010), 에세이집 『보길도 기행』(2014)을 펴냈다.

 

내가 대학 졸업을 하고 가진 첫 직업은 8년 전에 졸업한 초등학교 교사였다. 교육대학교를 졸업했으니 당연한 일. 그런데 왜 하필 모교로 발령이 떨어져 버렸을까.


집에서 보면 들판 하나를 건너 빤히 바라보이는 학교와 들판은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고, 내 눈에는 정체된 공간으로만 보일뿐이었다. 모든 일이 아버지의 공작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일본에서의 징용생활과 6·25전쟁을 겪은 아버지의 사고 속에는 가족은 항상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 특히 딸에게 타지생활이란 늘 불안의 요소였기 때문에 교육청에 입김을 넣어 고향집으로 다시 끌어들여버린 것이었다.


학교라는 직장은, 특히 할머니와 부모님이 계신 내 집에서의 직장생활은 참으로 안온했지만 내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편안하게 살려고 기를 쓰고 그 공부를 했더란 말인가. 세상이란 물살은 얼마나 멋지고 바쁘게 돌아가는데 나는 한걸음 비껴선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자 그 생각은 바이러스처럼 내 몸에 파고들어 자나 깨나 학교를 그만 둘 궁리만 하게 됐다.


그 후 학교를 떠나 뉴스라는 세파를 몸으로 겪는 언론계에 들어와서 나는, 아버지가 생전에 예언했던 ‘아스팔트길을 버리고 자갈길을 택한 벌’을 톡톡하게 받으며 살았다. 어느 때는 세상과의 갈등이 있었고, 직장에서는 앞날이 보장되지 않는 불안과 내가 가진 능력에 대한 회의가 몰아칠 때도 많았다.


아스팔트길 버리고 자갈길 택해


55세 정년퇴직. 미련도 후회도 없었다. “내가 택한 길 위에서 최선을 다했느냐, 얼렁뚱땅 시간만 메꾸었느냐”는 질문 앞에 그래도 최소한 나는 “옆길을 훔쳐보지 않으며 언론인으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는 걸로 위안을 삼으려고 한다.


퇴직하면서 ‘인쇄물로 기록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세 권의 책을 펴내게 되었다.


‘모바일혁명’, ‘환율천재가 된 홍대리’, ‘보길도기행’ 등 세권 모두 다른 분야의 책이다. 사람들이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헷갈려한다. 오지랖이 넓은 것이냐고 묻는다. 아니다. 나는 그냥 세상사에 아직도 호기심이 많은 전직기자일 뿐이다.


기자는 전방위형 인간이어야한다고 생각한다. 한 분야를 2년 정도 취재를 하면 책을 펴낼 수 있다. 보길도 여행 중 만난 보길면 면장과 식사를 하면서 그의 고민을 들었다. 보길도 관광이 최근에 청산도에 밀리고, 관광을 오더라라도 잘 뚫린 보길대교를 통해 차로 쌩하게 왔다가 쓰레기만 남기고 돌아가 버린다는 것이었다.


“보길도를 더 잘 홍보하고 싶다”는 그의 고민을 풀어주려고 기획한 책이 올해에 펴낸 ‘보길도기행’이다. 단순한 정보책자가 아니고 전적으로 나의 주관이 섞인 에세이다. 그래서 김나흔이란 필명을 지었다. 김나흔이란 이름으로 나는 객관성이 떨어지더라도 더 자유로운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비로소 나의 독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 한국관광공사로부터는 책을 기반으로 보길도관광을 업그레이드할 인문관광프로젝트를 받았다.


보길도서 보길도 프로젝트 실천


 

그래서 지난 8월 이후 보길도에 들어와 아주 살면서 일본 나오시마 섬의 ‘이에 프로젝트’를 벤치마킹한 힐링하우스 ‘비파원’프로젝트를 실천하고 있다. 한 시인이 7년째 비워둔 흙집, 돌집을 수리해 시와 음악과 그림이 있는 풍경을 만들려고 한다. 세연정과 직통하는 오솔길도 만들 것이다.


내가 필명을 하나 만들고 싶다고 하자 역술인 친구가 지어준 이름이 ‘나흔(     )’이다.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칼로 나무를 쳐 앞길을 불을 밝히듯 환하게 하다”란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름에 칼도(刀)획도 들어있다.


새로 지은 이름 탓인지 올 여름 보길도에 들어와서 실컷 낫과 호미를 들고 살았다. 7년째 비워둔 집이라서 칡넝쿨이 인도네시아 오지 밀림처럼 얽혀버린 집이었다. 평생 한 것보다 더 많은 노동력을 삼킨 집이 점점 꼴을 드러내고 있다.


칡넝쿨 밑에서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있던 차나무가 잎사귀에 윤을 내더니 요즘은 하얀 차꽃을 예쁘게 피워내고 있다. 뜰에 여러 그루의 비파나무가 있어 ‘비파원’이라는 이름도 그 때 지었다. 갑자기 풀숲 속에서 돌집 지붕이 드러나고 불이 켜지자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도 한 번씩 들여다보며 묻는다. “집이는 여그 뭐 하러 왔소? 나는 그냥 살으라 해도 못 살것그만?”


나도 그게 궁금하다. 이 나이에 나는 왜 보길도에 들어와 손과 발에 가시를 찔리며 모기와 싸우고 있는가? 관광공사의 프로젝트 때문이라면 구태여 이곳까지 오지 않더라도 광주에서 사무실을 하나 내고 컨설팅을 하는 컨셉으로 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관광’이라는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에 있고 싶다.


다시 돌아가신 아버지의 말씀이 들린다. “너는 왜 아스팔트길을 버리고 자갈길을 가려고 하느냐?” 비명에 간 모 대통령의 말을 빌려 “운명이다”라고나 할까? 사람은 누구나 두 개의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에 한 길을 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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