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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 본 나의 기자생활-이광이 자유언론실천재단 기획위원·전 무등일보 기자

작성자 : 광주전남기자협회 (211.198.190.***)

조회 : 3,840 / 등록일 : 15-04-07 16:32

 

되돌아 본 나의 기자생활

 

이광이 자유언론실천재단 기획위원·전 무등일보 기자

 

이광이 위원은

-무등일보 기자·노조위원장
-전국언론노조 선전국장·편집국장
-문화체육관광부 과장
-조계종 자성과쇄신결사 국장
-자유언론실천재단 기획위원

 

 

 따뜻한 봄날, 초등학교 운동장. 한 아이가 뛰어가고 있다. 저쪽에서는 새가 한 마리 날아온다.  새는 갑자기 급격한 하강 비행을 시도했다. 먹이를 발견했거나, 천적에게 쫓기는 중이었을까? 둘은 비슷한 높이가 됐다. 마주보고 달리던 아이와 새는 충돌했다. 아이는 한쪽 눈을 실명했다. 아이 가족은 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학교의 책임은 애매하다. 새는 피해를 보상할 능력이 없다. 이 허망하고 비참한 사건을 어찌할까? 20여년 전 지산동 법원에 다니면서 기억에 남는 사건이다.  


 나는 2사회부 소속 법조2진이었다. 책상에는 ‘우리 군수님’으로 시작되는 지역주재 형님들의 기사봉투가 수북했다. 오전에 국적불명의 언어들을 한글로 바꾸는 일을 마치고, 오후에는 법원에 갔다. 거기 가는 것은 치과에 가는 것만큼이나 싫은 일이다. 법조는 가난한 출입처였다. 점심 사주는 이도 없어 각자 해결하고 온다. 광주지법 한 구석 하꼬방만한 공간에서 1진은 화투 패를 늘어놓고 금일의 일진을 점치고는 했다. 2진은 서넛 무리를 지어 법원과 검찰청을 ‘사쓰마와리(察廻)’ 했다. 법원 수석부장판사실에는 판결문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각 사건마다 거의 책 한권 분량이다. 그것을 나눠 읽는다. 그 더미 속에서 기사거리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판결문은 다이제스트를 제공하지 않는다. 꺼리가 될 성 싶으면 통으로 읽고 메모해야 한다. 수첩을 서로 풀한다. 간혹 검경이 은폐했던 사건이 보석처럼 건져지기도 하지만, 그래서 법원에 특종은 없다.     

 

피해구제, 공공의 금고를 털어라


 나는 2년간 법원을 출입했다. 한자투성인 판결문을 의무적으로 읽어야 하는 일은 고역이었다. 시청이나 도청이 가고 싶은 출입처였다. 교육청은 마지막 남은 5공식 출입처라는 얘기를 풍문으로 들었다. 하지만 기자로서 내 근육은 법원에서 컸다. 판결문 안에는 삶의 모서리에서 빚어지는 온갖 사연들의 기승전결이 다 들어 있다. 그런 점에서 하나의 교과서다. 


 저 아이의 실명사건에 대해 판사는 학교에 관리책임을 물었다. 청구액의 6할을 보상하라고 주문한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도 억울한 측면이 있지만, 피해 구제의 책임은 감당할 수 있는 자에게 지울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다수이고, 기관이다. 나는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거나, 가해자의 무능으로 피해구제가 난감할 때, 공공의 금고를 털어야 한다는 논리를 지산동에서 배웠다. 그것을 어느 정도 비약하면, 우리는 세월호의 해법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법원은 지금 생각하면 낙타의 시간이었다. 니체가 말한 낙타-사자-어린아이를 거치는 3단계 중에 처음 거쳐야 하는 시간. 짐을 싣고 사막을 건너는 낙타처럼, 묵묵히 견디고 습득해야 하는 시간이다. 거기서 이성과 논리의 칼을 벼리고, 자존을 키운 후에 강호에 나가야 한다. 나는 술집에서 자존이 스스로 크는 것으로 믿었다. 목청을 높이고, 주먹으로 탁자를 치고 분노하면서, 사자의 시간에 진입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왕궁의, 저 왕궁의 음탕에는 침묵하면서, 50원짜리 갈비에 왜 이렇게 기름덩어리만 많이 나왔냐고 돼지 같은 주인 년에게 욕을 해대는 김수영처럼, 그것은 술집 문밖에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소음 같은 것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깨달았다.  

 

나는 난파선의 노조위원장이었다


 1997년, 거대한 해일이 덮쳤고, 우리는 2년여 비틀거리는 항해를 계속하다, 1999년6월30일 결국 침몰했다. 나는 불행하게도 그 난파선의 노조위원장이었다. 아무도 위원장을 맡으려고 하지 않아, 정말 노조의 간판을 내릴 수 없어 내가 떠맡았던 것인데, 결과는 가혹했다. 당시 무등일보는 20억원이 넘는 임금 퇴직금 채무를 남기고 폐업했다. 돈을 받아내 100여명에게 나눠 지급하는 것이 남겨진 숙제였다. 그것은 운명처럼 다가온 슬프고, 고통스럽고,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민주노총으로부터 4시간 교육을 받은 뒤 갓 꾸려진 한 무리의 시위대를 이끌고, ‘임금지급과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지산동까지 낯설고 두려운 ‘투쟁’의 길을 걸어가던 그 여름날을 잊지 못한다. 그날 이후, 나는 기자의 옷을 벗고, 노조위원장을 무려 5년이나 해야 했다. 우리는 채권의 90% 정도를 받아냈다. 함께 싸운 동지들은 ‘그날이후’라는 모임을 결성했고, 매년 7월 첫 토요일에 만난다.  


 그것은 사자의 시간이었다. 암울하고 혹독한 세월이었지만, 나는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내가 투철해서가 아니라, 분노가 있었고, 내 이름 뒤로 100여명의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자의 시간 속에서 사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운명이었다. 나는 그렇게 10여년의 짧은 ‘기자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떠났다. 


 봄부터 소쩍새가 운다. 여름에 천둥이 치더니, 가을에는 무서리가 내린다. 그래야 누님처럼 생긴 꽃 한 송이가 핀다. 꽃은 아득히 돌아온 세월의 뒤안길, ‘어린아이’의 시간에 핀다. 펜이 운명인 사람들, 언제나 선후배라는 이름으로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람들, 우리들 모두 꽃이 되어 만나기를 소망한다.

 

- 이광이 자유언론실천재단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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