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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 본 나의 기자생활] 신선호 동신대 초빙교수·전 KBC 광주방송 보도국장

작성자 : 광주전남기자협회 (211.198.190.***)

조회 : 3,446 / 등록일 : 15-07-07 12:46

 

 

<사진설명>KBC광주방송에서 지난 2002년

정몽준 국민통합21 대선후보를 초청해 토론회를 하고 있다.

 

 

[되돌아 본 나의 기자생활]

신선호 동신대 초빙교수·전 KBC 광주방송 보도국장

 

 

신선호교수는

·여수문화방송(MBC) 보도국 취재기자
·광주방송(KBC) 보도국장, 동부방송본부장
·광주시청자미디어센터장
·광주전남기자협회 부회장
·한국청소년영상제 심사위원장
·동신대학교 방송연예과 초빙교수

·현)광주전남 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
·현)‘시민플랫폼 나들‘ 나들학교장
·현)광주전남언론학회 기획이사

 

 

 

지역공동체 한걸음 진보에 함께해 즐거워

 

 

기자로 살았다. ‘네가 기자냐?’ 숱하게 자문하며 그렇게 방송기자로 내 인생 앞자락을 달렸다. 대학시절 학내신문 기자로 활동한 것을 시작으로 여수MBC 10년을, 그리고 다시 KBC(광주방송) 14년을 기자로 살았다. 그 24년, 방송인생의 전반부가 기자로서 공급자 역할이었다면 이후 광주시청자미디어센터 4년여 생활은 완벽하게 수용자의 입장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였다. 방송교육과 제작지원 등으로 시민 시청자들을 그동안의 소극적, 무비판적 수용자에서 능동적 이용자, 생비자(프로슈머)로 바로 설 수 있도록 지원하는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이젠 대학에서 신문방송학 강의를 하는 한편 광주전남 민주언론시민연합 등 시민단체에서 시민주체의 마을공동체 활성화운동과 시민기자 교육, 마을미디어 지원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렇게 나는 여전히 방송미디어 안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지난 시간 많은 부분 나는 기자로서 행복했다. 대학시절 하고 싶었던 일로서 꿈을 이루고 살았으니 무엇보다 그러하다. 현장기자로서 또는 줄곧 뉴스앵커로서, 시사토론 진행자로서 현장을 취재 보도하거나 지역현안에 대한 특집제작과 토론을 이끌며 선후배 동료들과 기쁨과 보람을 함께 할 수 있었으니 더욱 그렇다. 나의 꿈과 작은 노력으로 우리 지역공동체의 한걸음 진보에도 기여할 수 있었다며 내심으로나마 자부할 수 있으니 참 감사한 일이다.
 
다시 돌아보면, 방송사 기자생활은 90년대 초반까지는 권력과, 90년대 중반 이후는 자본의 민낯과 맞닥뜨리는 시절이었다. 1980년대, 방송마다 ‘땡전뉴스’로 ‘전비어천가’를 불러댈 때 박종철, 이한열 등 수많은 청년 대학생들의 희생이 이어졌으며 이른바 노태우 6.29선언을 이끌어낸 1987년 6월 항쟁 속에서 기자들은 무임승차라는 자괴감을 갖고 있었다. 결국 서울 MBC 기자들의 방민추(방송민주화 추진위원회)가 한국방송사상 최초의 노조설립으로 이어졌고 이를 신호탄으로 목포, 여수, 광주 MBC등의 차례로 공정방송을 기치로 내건 노조운동이 시작되었다. 나 역시도 여수MBC 초대노조 위원장으로서 동지들과 함께 징계와 해고에 맞선 단식과 가두홍보, 청와대 낙하산 황선필 사장 퇴진투쟁과 전국 MBC 연대파업 등으로 군부정권과 그 하수인격인 경영진과 싸워야 했다. 역시 갓 출범했으나 해고의 피바람을 견뎌내고 있던 전교조와의 지역단위 연대는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 당시 함께 했던 이들이 여수의 이청연 오병종 박수석 PD 등이었고 광주의 서규순, 오창규, 목포의 나영진, 윤사현, 서울의 정기평, 최용익, 심재철 그리고 우리가 당시 큰형님으로 불렀던 서울신문의 권영길 등이었다. 1988년 2월, 회사쪽의 회유와 협박을 피해 노조설립 신고서를 들고 시청을 찾아갔을 때 당시 노정계장이 “기자가 뭔 노조를 다...” 하며 호기심과 곤혹스러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바라보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방송 노조 설립 주도 '평화의 댐' 보도 부끄러워

 

그 무렵 1987년 당시 평화의 댐 성금 모금운동에 동원됐던 기억은 나의 기자생활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다. 방송사마다 북한의 금강산댐을 이용한 수공작전으로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며 컴퓨터 그래픽으로 방류수가 63 빌딩 절반 높이까지 들어찬 모습을 보여주는 등 호들갑으로 국민들을 위협하고 범국민적 모금 분위기를 조성했다. 날마다 모금액이 전국 방송사마다 내부적으로 순위가 매겨져 내려왔고 기자들은 취재는 뒷전이고 출입처별로 이른바 평화의 댐 성금 유치경쟁을 벌여야 했다. 거리에서는 중계차를 동원해 모금함을 놓고 기관단체장과 기업체 대표, 어린이, 주부들을 동원해 줄지어선 모금 쇼를 벌이고 한편으로는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코 묻은 돈에서부터 기업체 기관단체, 동네별 통반장까지 찾아다니며 성금의 자사 기탁을 을러대거나 부탁해야 했다. 그리고 불과 1년 후 ‘5공 청문회’에서 평화의 댐 사업은 북한 위협을 정치적으로 과장한 ‘대국민 사기극’이었음이 결론지어졌으니... 당시 출입처의 성금 기탁독려에 소극적이던 내게 누군 하고 싶어 이 짓 하는 줄 아느냐며 강하게 힐난하던 선배는 예나 지금이나 말이 없다.

 

‘그동안 왜곡, 굴절되어온 방송체제는 전면적으로 고쳐져야 하며 방송의 고유 기능은 시청자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전적으로 방송인에게 맡겨져야 한다 ····· 권력자가 임의로 임명한 관선 임원들의 비민주적 회사 운영과 근로자들의 대응능력의 결여로 오늘날의 방송은 정치권력의 입장을 대변하도록 호도되었다. 결국에는 국민 우중화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당시 MBC 노동조합 창립선언문 가운데 일부이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내용에서 시대적 차이를 거의 느낄 수 없음에 착잡한 마음이다. 

 

마을 속으로 주민 곁으로…마을미디어 '활짝'

 

김중배 선생은 1991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직을 내던지며 “앞으로 언론은 권력과의 싸움에서 이제 더욱 원천적인 제약 세력인 자본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고 경고했다. 그의 말은 큰 울림으로 예언처럼 곧 현실이 되었다. 방송민주화를 기치로 내걸었던 언론노조들은 대부분 복지노조의 길을 걸었고 기자들도 금융위기 등을 겪으며 자사이기주의로 직업인으로 한없이 작아지며 연대의 틀은 하나 둘 깨져나갔다. 애당초 언론관이랄 것조차 없이 황금알 낳는 거위 정도로 여기며 접근한 자본주들은 모기업이 어려워지면 예외 없이 웃돈 챙겨 방송을 팔아넘기고 떠나갔다. 그 와중에서 기자들은 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희생되어야 했고 남은 이들은 더 깊은 상처와 노동강도에 시달려야 했다. 그것은 최근 광주일보 노조가 낸 회사인수 자본의 성격과 관련한 성명에서 보듯 지금 우리 지역언론의 모습이기도 하다. 

 

SNS 뉴스시대, 시민기자 시대, 그리고 다시 뉴스 전성시대라고 한다. 전통적인 매스 미디어에서 디지털 마이 미디어로 그리고 다시 흐름은 마을 미디어로 옮겨지고 있다. 마을민주주의, 시민주체의 일상 속 직접민주주의의 구현에 누구보다 기성 언론이, 전문 기자가 마을주민들과 함께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 이제 마을 속으로, 주민 가운데로, 생활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지역친화 차별화 전략이다. 
  
계절은 또 한 구비 물결쳐가고 있다. 꽃들은 피고지고 햇살은 더욱 촘촘해지겠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씨앗을 손에 들고 새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겠다. 구름이 낮게 내려올수록 새의 노래를 품은 씨앗, 열매 맺는 언어들이 힘 있게 뿌려지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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