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션의 잘못된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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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광주전남기자협회
- 작성일 13-03-19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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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케이션의 잘못된 신화
남궁협 광주ㆍ전남 민언연 상임대표
커뮤니케이션 행위의 목적이 서로의 차이를 좁히고 공통분모를 넓히기만 하는 것일까? 누구나 이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 주저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어떤 의제를 놓고 여러 사람이 모여 토론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라든지, 부부는 오래 함께 살다보면 서로 닮는다는 말은 커뮤니케이션의 그러한 의미를 쉽게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국회에서 여야 사이에 합의보다 의견충돌이 더 많은 이유는? 부부가 오래 살다보면 서로 닮기보다는 비로소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게 된 것은 아닐까? 심지어 사랑의 감정이 샘솟는 젊은 연인 사이에도 일치감의 희열보다는 티격태격 하는 사랑싸움의 빈도가 더 많지 않은가? 가만히 우리의 삶을 들여야 보면 일치와 통합보다는 불일치와 갈등이 지배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더구나 커뮤니케이션의 빈도가 높은 집단이나 개인일수록 더 많은 갈등과 차이를 노출시킨다. 그렇다면 커뮤니케이션은 통합과는 무관하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반비례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칸트는 "인간은 서로 공통의 인식을 할 수 있는 선험적 인식체계를 타고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이런 논거가 곧바로 커뮤니케이션은 주체와 대상의 일치, 주체와 주체의 일치, 혹은 언어와 사물의 일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커뮤니케이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공통성보다는 개별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인간 행위인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은 인간에 의해서 개별적인 존재들의 의미를 내보이는 행위인 것이다. 가령, 내가 길가에 핀 개나리를 시로 표현하는 것은 그때 그곳에 있던 개나리의 개별적 특성과 그것이 나에게 표상되는 느낌을 특별하게 드러낸 셈이다. 따라서 쌍방의 의미를 동등하게 표출하지 않는 커뮤니케이션은 더 이상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다. 더구나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의 의미를 일방적으로 일치시키려는 커뮤니케이션은 폭력이나 다름없다. 오늘날의 환경파괴도 본질적으로 자연을 대상화해 인간의 의미에 일방적으로 복속시키려는 폭력의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게 하고, 제도의 틀에서 배제된 사람들에게 언어를 부여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나 아렌트가 정치를 "차이를 드러내는 언어적 행위"라고 말한 것처럼, 인간은 의미를 먹고 사는 존재이다. 인간적인 커뮤니케이션이라면 본질적으로 불일치를 지향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와 너의 다름을 확인하는 것, 그래서 새로운 의미를 공유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이다. 커뮤니케이션은 체제안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체제파괴와 창조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커뮤니케이션은 불온한 것이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의 이념을 제도적으로 구현한 게 언론이다. 고로 언론의 생명은 뭐라 해도 '비판'에 있는 것이다. 표현의 기회로부터 배제된 자들의 목소리를 찾아서 그들의 의미를 대신 표현해주는 것이 언론이다. 그래서 수많은 다름과 차이가 표출되도록 하는 것이 언론이다. 결국 언론의 사명은 부단히 기존의 의미를 부정하고 새 의미를 구성하는 데 있다. 이미 자본과 권력이 돼버린 언론은 스스로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언론이라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요즘 수많은 미디어가 새롭게 등장하고 있지만 그것이 현실을 부정하는 비판의 칼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창조하지 못하고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흉기로 변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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