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 본 나의 기자생활 - 김정호(향토문화진흥원 이사장, 전 무등일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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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광주전남기자협회
- 작성일 15-02-12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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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김정호 이사장이 지난해 12월 18일 광주전남기자협회 올해의 기자상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수상한 뒤 구길용 회장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되돌아 본 나의 기자생활
김정호 향토문화진흥원 이사장(전 무등일보 편집국장)
김정호 이사장은
-전남일보 업무국 보급부장(부국장)
-광주일보 향토문화연구소장·논설위원 겸 편집위원
-무등일보 편집국장·기획실장
-전라남도 영산호관관농업박물관장
-문화관광부 21세기문화정책위원회 위원
-현)향토문화진흥원 이사장
기자는 글을 쓰고, 그 글은 사회에 유익해야
진도에서도 읍에서 30리 거리의 ‘뱀골’이라 부르는 작은 동네에서 태어난 촌놈이라 기자라는 직업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상무대 안에 있던 육군항공학교에서 5·18을 겪으며 만기제대를 한 뒤 당시 신분상승의 유일한 창구라 할 수 있는 고시준비를 했다. 지산동 딸기밭 농막에 앉아 육법전서를 외워갔지만 응시에 자신을 갖기까지는 최소한 4년 세월은 버텨야 할 것 같았다.
자유당 말기 시골 군부에도 지국장들이 기자행세를 하던 때가 있었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언론계 정풍 바람이 불어 급료를 지급하지 않는 시·군부 보급소장들(당시 직함은 지국장)의 취재가 금지되었다. 당시에는 신문 보급을 위해 시급지사나 지국장이 임명한 지방 기자들이 있었으나 본사에서 급료가 나가지 않는 기자는 모두 정리했다.
63년 중앙일간지들이 기존의 지사 기자와 구별하기 위한 방편으로 지방특파원이란 이름의 주재기자를 공모했다. 그래서 조선일보 주재기자 공모에 응시해 합격하면서 내 인생이 결정되었다. 2개월간 서울에서 수습교육을 받은 뒤 광주지사에 배치되어 이미 기자로 근무 중이던 고인이 되신 최계원(광주시립박물관장)씨의 조수 겸 수습기자 생활을 했다. 당시 주재기자는 광주에 2명, 목포, 여수, 순천에 각 1명씩 5명으로, 이들이 전남판이란 지방판을 담당했다. 지방판에는 15건 내외의 기사가 실려 하루 3건 이상의 기사를 철도편으로 본사에 송고했다. 물론 급한 기사는 전화로 송고하고 사진은 전신전화국에 가서 전송하던 시절이다.
이 때 수석기자인 최계원씨는 도청과 정치를 맡고 나머지 기관은 모조리 내 담당으로 경찰국, 경찰서, 검찰청 등 주로 사건담당기자였다.
"지역전문가 되겠다" 중앙지서 지방지로
68년 삼성이 중앙일보를 창간하면서 중앙일보에 발탁되었으나 서울에 가서 임명장만 받고 내려와 곧 사표를 제출했다. 광주에서 이동없이 계속 근무해야했던 신분이었던 데다 취재반장인 최계원씨가 이동하지 않는 한 평생 경찰출입기자로 인생을 마감할 것 같은 회의에 빠져 있었다. 본사에서 1년 이내에 최계원씨를 지사장으로 위촉하고 취재반장을 넘겨주겠다는 본사의 설득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다 이듬해가 되어도 변화가 없더니 본사근무로 발령이 났다. 당시 치안부는 사회부차장이 출입하고 그 밑에 7명의 기자를 배치, 각 경찰서를 출입시키던 시절인데 내게 종로서를 출입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시골에서 사건기자로 능력을 발휘했더라도 시골티를 벗으려면 경찰을 나가면서 서울분위기를 익혀야 된다는 것이었다.
사건기자에 신물이 나서 조선일보를 그만두려 했는데 본사에서 다시 수습과정을 거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시는 주재기자 그룹에서는 몸값이 있던 때라 그만 시골로 내려가겠다고 했더니 지방부에 배치, 경기판 담당을 보도록 해주었다.
광주지사가 정리되면 최계원씨를 지사장에 임명하고 나를 취재 반장으로 보내기 위한 포석이었으나 최기자가 선뜻 광주지사장을 수락하지 않아 곧 사표를 제출하고 광주로 돌아왔다. 그래서 69년 입사한 곳이 전남일보 사회부 차장이었다. 당시 전주출신 이규태씨가 조선일보 사회부 차장을 거쳐 조사부장이 된 뒤 개화백경을 연재하고 있었다. 그는 내게 지방대 출신이면서 전라도 출신으로는 조선일보에서 직장 생활은 되겠지만 언론인으로 뜻을 펴기는 어려울 것이니 차라리 시골에 내려가서 뜻을 펴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충고해주었다.
지방지로 옮기는 결단을 내리면서 많이 고뇌했다. 지방에서 신문사 편집국장이 된들 지역사회에 무슨 공헌을 할 것이며 그 이후에는 무엇을 하고 지낼 것인가 생각할수록 막막했다. 조선일보 조사부에서 묵묵히 앉아 근현대사자료를 모아 한국학의 전문가대열에 들어선 이규태씨가 생각났다. 비록 시골 신문기자가라 하더라도 지역특성에 대한 전문가가 되면 살길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전설의 현장' 3년간 200회 연재
전남일보 전입 후 1년 만에 섬취재에 나섰다. 법성포에서 출발해 경남 남해도까지 2개월간 섬과 섬을 돌고 돌아 『섬·섬사람』이란 제목으로 50회를 연재해 72년 ‘한국신문상’을 탔다. 73년에는 ‘민속의 향기’ 30회를 연재하고 75년부터 3년간에 ‘전설의 현장’ 200회를 연재했다. 78년 중앙국립박물관에 시작한 박물관대학 1기생으로 등록해 1년간 50강좌를 받은 뒤 신문사 안에 향토문화연구소를 개설해 간사를 맡았다. 80년 전남매일과 통합되어 광주일보가 되면서 조사부장 겸 전일도서관장, 향토문화연구소장 등을 맡아 이듬해 1월부터 2년간 역사 현장을 찾는 ‘옛터’란 제목의 연재물을 133회 연재했다. 이 연재를 끝내고 83, 84년 두 해에는 ‘전남성씨고(全南姓氏考)’, ‘전남의 토박이’를 연재했다. 편집국을 떠나 있으면서도 단독연재의 특집을 계속했다.
88년 무등일보 창간 편집국장을 맡아 89년과 90년 ‘세계의 다도회’, ‘중국산동반도역사기행’, ‘청해진’ 등을 연재했다. 91년 무등일보를 그만두고 금호문화에 ‘한양 2천리’를 2년간 연재했다. 아직도 나는 무등일보에 매주 ‘광주역사산책’을 1회에 20매씩 기고하고 있다.
기자란 ‘글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이 옳다면 나는 아직도 기자이다. 신문잡지류에 기고한 글만 모아낸 책이 45권을 넘어섰다. 인기 없는 책들이라 인쇄비만 들인 셈이지만 이 분야에 관심을 갖는 후배에게는 도움이 될 때가 있으리라 믿어 뿌려왔다. 모름지기 기자는 글을 써야하고 그 글은 사회에 유익해야 한다. 나의 부끄러운 기자 생활의 발자취가 후배기자들의 전문화에 도움이 되었으면 다행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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