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 본 기자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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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광주전남기자협회
- 작성일 14-03-14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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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노병(老兵)이라고 일컫는 나이가 들었다. 지방신문에서 40여 년 동안 일해 오면서 잘한 것이 별로 없다. 그러한 내가 ‘기자생활을 되돌아본다는 것’은 부끄럽기도 하고 어려운 고역(苦役
)일 수도 있다. 때문에 그 고역을 선뜻 할 수가 없으나 기자협회의 배려가 고마워 지난날의 한 순간을 돌이켜 본다.
나의 기자생활 중 가장 치열한 순간은 광주민주항쟁을 전 국민들에게 알리는 1980년 6월2일자 신문제작에 김준태 시인이 쓴 시 ‘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싣는 작업이었다. 내가 근무한 옛 전남매일신문(현 광주일보)은 당시 5월21일자로 신문제작을 중단했다.
전두환 퇴진과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는 광주시민들을 총으로 쏴 죽이는 것을 기자들이 총총한 귀와 눈으로 보고 들었는데 이 사실을 보도할 수 없으니 어찌 신문을 만들 수가 있었겠는가. 이후 11일 만인 6월2일에 어렵사리 신문을 제작하게 되었다. 이날은 출근 때부터 신문이 발행되기까지 한순간 한순간을 역사의 죄인이 되는 고비로 넘겨야 했다.
출근하자마자 심상우 사장(호남로켓트건전지 회장 겸임, 후에 국회의원, 버마 아웅산 테러 순직, 개그맨 심현섭 부친)이 나를 불렀다. 사장이 나를 호출한 것은 내가 평소에 기자들의 의견을 대변하고 신문사의 언론민주화운동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사장은 매우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 신문은 내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여러 직원들의 신문이고 더불어 광주전남 시도민들의 신문이다. 오늘 신문은 기자들의 뜻대로, 기자들이 의견을 모아 사실 그대로 제작하길 바란다. 신문사 판권과 인가를 취소당해도 좋다. 사장의 입장에 부담을 갖지 말고 제작을 해 달라”며 말하는 사장의 눈에 눈물이 머금어졌다.
사장의 말을 듣고 나는 다리가 휘청거리며 피가 멈추는 듯 머리와 가슴의 기능이 정지되는 듯 했다. 사장의 말을 그대로 기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만약 그렇게 제작을 감행한다면 이 신문사는 어찌 될 것인가. 숨을 가다듬자. 생각을 정리하자. 광주상황도 보도하고 신문사도 살릴 방법을 찾아보자. 일단 나는 사장의 말을 전달하지 않기로 했다.
편집국에 돌아가니 부장단 제작회의가 열렸다. 부장단 회의에 보안사 보도지침이 전달되었다. “광주 상황을 일체 보도하지 말고 통신으로만 신문을 제작하라”는 것이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침통하게 눈을 감았다. 사회부장인 내가 편집국장에게 제안을 했다. “너무나 중요한 일이니 전체 기자회의를 열자”고 말했다. 전체 기자회의에서 약 30%정도는 “가족들도 살아야 한다”면서 소극적이고 미온적인 의견을 표명했다. 70%정도의 기자들이 “사실 그대로 전부 보도하자”고 주장했다. 그들은 광주민주항쟁을 사실대로 알리고 사직을 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그러나 주어진 상황은 그 것을 넘어 서기가 너무 힘든 상황이었다. 계엄령과 검열에 신문발행 허가취소까지 원척적인 통제로 묶여 있는 상태였다. 어느 누가 총알받이, 화살받이가 될 것인가. 기자들은 고민과 고통 속에 저마다 속죄를 되 뇌이며 제작 방향을 잡았다. 그 날은 제한된 여건상 신문을 4개면만 제작하되 사회면에 광주상황을 간접적인 기사작성 방법으로 가능한대로 보도하기로 했다. 대신 정치면에 광주민주항쟁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시를 게재하기로 했다. 나는 문순태 부국장(소설가)에게 시인을 선택해 달라고 요청했다. 처음 부탁을 했던 시인의 시가 적합지 못해 다시 선택한 시인이 전남고 김준태 교사였다. 원고 청탁을 받은 김 시인은 1시간 정도 짧은 시간에 “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시를 써서 달려왔다. 그 시는 우리들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버리 듯 처절한 시였고, 광주민주항쟁을, 시민들의 죽어가는 모습을 그대로 표현했다. 전남도청에 설치된 계엄분소 언론 검열실에서 이 시가 통과가 될 것인가? 모두가 망설이고 주저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광주시민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런 걱정이 문제인가. 그대로 제작을 하자” 나와 문 부국장, 1면 편집자 윤유석 차장(한겨레신문 이사)이 앞장을 섰다. 사직을 각오한 많은 기자들이 과감하게 힘을 모았다. 그렇게 애간장을 태웠음에도 “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는 검열에서 깎이고 깎여 1백8행의 시가 32행으로 줄었다. 원 제목이 깎여 “아 광주여”만 남았고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등 광주의 통곡을 뜻하는 76행을 모두 깎고 찢어 버렸다. 하지만 몹쓸 검열로 산산조각이 난 이 시가 막상 신문에 실리자 기가 막히게 독자들은 깎여 나간 부분의 뜻까지 헤아려 광주의 비극을 읽었다. 이 시는 전 국민의 심금을 울려 서울에서, 대전에서, 대구에서, 부산에서 몇 십부, 몇 백부를 보내라는 바람에 밤샘까지 하며 신문을 인쇄했다. 이 신문이 광주민주항쟁을 처음으로 전국에 알리는 신문이 되었다. 이날 이후 2~3개월이 지나고 김 시인은 학교에서 해직되고 우리 신문사에서도 8~9명이 강제 해직 되었다. 이중 나와 문 부국장, 윤 차장의 해직 이유는 김 시인의 시를 게재한 것이었다. 이렇게 광주민주항쟁을 전 국민에게 알린 시 “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는 시를 쓴 김준태 시인, 심상우 사장의 헌신적 뒷받침, 피바다가 된 광주를 살리겠다는 기자들의 뜨거운 사명감이 한데 합쳐져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오늘 그때 그 순간을 되돌아보니 “잘 했다”는 생각보다 내 자신에 대한 아쉬움, 광주시민에 대한 미안함으로 마음이 가볍지가 않다. “역사의 역사로써”기사를 쓰는 것이 기자의 소명이라면 그때 더 용기를 내 광주 전부를 썼어야 했는데 하고 자주 후회를 한다는 고백을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다.



사진설명
1.2007년초 광주에서 고건 전 총리와 대통령 후보 출마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김원욱사장.
2.1996년 광주매일 전무때 교외 유채 밭에서
3.광주전남기자의 밤을 창설한 공로로 기자협회로 부터 공로패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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