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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 본 나의 기자생활 - 정재현(맥지청소년사회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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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광주전남기자협회
  • 작성일 14-07-02 14:54
  • 조회수 6,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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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1993년 9월 시베리아 횡단취재 당시 모습(아래 왼쪽)과 지난해 2월 광주시 북구 우산수영장

 맥지미래갤러리 개소식에서 관계자들과 축하케이크을 자르고 있다.

 

되돌아 본 나의 기자생활

 

정 재 현(맥지청소년사회교육원장, 전 광주일보 논설실장)

 

정재현 원장은

 - 조선대학교 졸업
 - 광주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 수료
 - 광주일보 사회부장·경제부장·사회2부장
 - 광주일보 편집부국장·논설실장
 - 광주일보 노조위원장
 - 행정안전부 시군통합위원회 위원
 - 광주지방검찰청 시민위원회 위원
 - 광주 북구 건강복지타운 우산수영장 센터장(현)
 - 맥지청소년사회교육원 원장(현)

 

 

취재원과 ‘형님·동생’ 기자 책무 방해

 

  내가 기자활동을 가장 왕성하게 했던 80, 90년대는 한마디로 격동의 시대였다. 특히 광주·전남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이후 좌절과 울분으로 가득 찬 암울한 시대였다.
80년대 중후반은 시위로 날이 새고 날이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나는 사회부 사건기자로 시위현장에서 거의 하루를 보냈다. 사건기자들은 새벽 1~2시 시위가 끝날 때쯤 최루탄을 흠뻑 둘러쓴 채 회사에 들어와 그날의 상황을 사건 캡에게 보고하고 퇴근해서 잠깐 눈을 붙인다. 다음날 아침 6시께 관할 경찰서에 들어가 전날 시위에서 잡혀온 인원과 처리 상황, 당일 시위정보, 일반 사건사고 등을 점검하고 회사에 들어와 기사를 작성하고 다시 시위 현장에 나간다. 특히 1987년 ‘6·29 선언’을 이끌어낸 6월 항쟁 때는 이런 생활이 한 달 이상 계속되기도 했다.

 

 

“제대로 보도했나” 고민에 또 고민

 

  당시 내가 괴로웠던 점은 육체적 피곤함보다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다’며 시위대로부터 배척당하고 수모를 겪을 때 느낀 기자로서의 좌절감과 무력감이었다. 이번 세월호 참사 때 KBS기자들이 현장에서 유족들로부터 ‘기레기’라며 수모를 겪을 때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래서 사실보도와 진실보도는 기자의 존재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의 기자생활을 돌아보면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시류에 편승한 ‘3류 기자’가 아니었는지 부끄러울 뿐이다. 


  나의 기자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점은 전교조와의 인연이다. 사건기자를 끝내고 광주시교육청 2진으로 출입을 하게 된다. ‘윗분’들이 사건기자로 고생했으니 좀 편한 자리(?)로 배려해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87년 9월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가 출범으로 시작된 전교조가 기다리고 있었다. 교사 구속 107명, 강제 해직 1500여 명이라는 전대미문의 교사 노동운동 탄압이 자행됐던 전교조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특히 광주·전남은 전교조 운동이 가장 먼저, 치열하게 전개됐던 곳이다.


  해직교사의 마지막 수업과 등교 투쟁 등 밤낮없이 현장을 누볐다. 나는 현장취재와 기자 수첩 등 칼럼을 통해 전교조 편에서 많은 기사를 썼던 것 같다. 당시 어려운 상황에서도 편집국장과 사회부장 등 선배들의 배려와 격려가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그 때 참교육 실현을 위해 선구자적 역할을 한, 이미 고인이 된 윤영규 전교조 초대 위원장, 정해숙 선생님, 장휘국 현 광주시교육감 등의 활약상이 기억에 남는다. 특히 전교조 광주지부장을 역임했던 오종렬 선생님(현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은 지금도 내가 존경하는 인물 가운데 한 분이다. 참교육과 통일, 평화, 인권을 위해 평생 묵묵히 고난의 길을 걸어 온 그의 삶은 나의 기자생활에 귀감이 됐다.


  나는 기자생활 중 사회부 5~6년을 제외하면 경제부에서 거의 보냈다.
경제부 기자 생활 중 잊을 수 없는 기억은 92년 신년 특집으로 환태평양 시대 취재를 위해 동남아 6개국과 호주 뉴질랜드의 해외 취재 였다. 당시만 해도 지방언론으로서 해외취재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사진기자 없이 홀로 취재하면서 많은 고생도 했지만, 기자로서 안목을 한단계 업그레이드한 계기가 됐지 않았나 생각한다.


  특히 93년에 한 달 동안 사할린을 걸쳐 블라디보스톡~모스크바까지의 시베리아 횡단 취재는 30년 기자생활 중 잊을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다. 당시 시베리아 횡단 취재는 전국 언론사 가운데 최초였다고 생각된다. 시베리아 횡단 취재 중 한러 국경도시인 핫산에서 유유히 흐르고 있는 두만강과 철교 건너편의 북한 땅을 바라보며 느낀 감회는 지금도 새롭다. ‘북한은 도와 줄 동포(남한을 지칭함)라도 있지만 우리는 아무도 없어 막막하기만 하다’는 소비에트 연방 붕괴 후 처참히 망가진 민생경제를 한탄한 러시아 국경초소의 젊은 책임자의 말도 생생하다.

 


광주·전남 경제사 정리 못해 아쉬워


  지금 아쉬운 점은 현직기자로 있으면서 광주전남지방경제사를 정리하지 못한 점이다. 지역경제 생산 주체로서 기업이나 산업의 변천사, 그리고 농민, 근로자의 삶을 통한 지역경제의 명암을 조명해 지역경제의 낙후 원인을 밝히고 미래를 제시할 수 있는 후배기자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자는 자기 절제와 자기 관리가 우선 돼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현역시절에 보면 출입처나 업무 관련자와 너무 쉽게 형님, 동생 하며 밀착한 기자들이 의외로 많았다. 물론 인맥관리 차원에서 형님, 동생하며 친분을 쌓을 수 있다. 그렇지만 기자의 최우선 책무는 감시와 견제가 아닌가. 나는 무분별한 ‘형님 동생 문화’ 속에서 기자의 책무를 다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기자는 취재 대상과는 적당한 긴장관계에 있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문창극 참사’는 기자로서 자기 절제와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30대, 40대, 50대 인생의 황금기를 기자로서 보냈다. 돌이켜보면 아쉬운 일이 너무 많다. 하지만, 한 직장(광주일보)에서 기자로서 정년을 맞이했다는 자부심도 있다. 선배·동료·후배들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모두에게 감사하고 그동안 말없이 뒷바라지해준 아내가 한없이 고맙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언론의 본분과 지역발전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선후배 기자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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