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지역언론을 보다<5> 르몽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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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광주전남기자협회
- 작성일 24-12-05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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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권서 상대적 짧은 프랑스 신문 역사…결점 아닌 영광의 상처
프랑스의 지역언론을 보다<5> 르몽드

1944년 독일군 퇴각 … 해방 전후로 신문 발행
정부, 언론 관련 훈령 내려 부역 언론 처단하기도
정론지 대한 염원 모아 그해 12월 ‘르몽드’ 발간

<르몽드>는 올해로 창간 80주년을 맞는다. 민주주의와 공화국, 그리고 혁명의 나라 프랑스의 대표 정론지로 불리는 신문이 우리나라 신문보다도 늦게 생겼다는 사실이 의아하다. 참고로 <뉴욕타임스>(1851년), <워싱턴 포스트>(1877년), <더 가디언>(1821년) 등 한국 언론들이 인용하기 좋아하는 영미권 신문들은 200주년을 향해 달리는 중이다. 프랑스 언론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은 이유는 지역 언론들을 잘 들여다보면 알게 된다.
<우에스트 프랑스>, <쉬드 우에스트>, <르파리지앵> 등 전국지와 경쟁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 프랑스의 지역별 대표 언론의 역사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다. 세 신문 모두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에 생겨났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같은 해에 문을 열어 올해로 창간 80주년을 맞는 신문사는 <르몽드>와 이들 세 곳 말고도 여럿 있다. 그 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프랑스의 언론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하다.
위에 언급한 세 지역지의 창간일에서 힌트를 얻어볼 수 있다. <우에스트 프랑스>는 8월7일, <쉬드 우에스트>는 8월29일, <르파리지앵>은 8월22일에 각각 창간호를 냈다. 이들 날짜는 해당 지역이 독일군으로부터 해방된 날과 멀지 않다. 1944년 6월6일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하면서 서부지역으로부터 독일군이 퇴각하기 시작하자, 독일에 점령돼 있던 프랑스 도시들이 하나둘 해방을 맞은 것이다.
<우에스트 프랑스>의 본사가 있는 렌느는 8월4일, <쉬드 우에스트>의 보르도는 8월29일, <르 파리지앵>의 파리는 8월25일 해방을 맞았다. 세 신문 모두 해방을 전후해 1호 신문을 찍은 것이다. 프랑스 동부지역을 대표하는 <도피네 리베레>(8월22일 창간), 서부의 브르타뉴 지역에서 발행되는 <르 텔레그람>(9월18일 창간) 등도 비슷한 시기에 생겨났다.
이렇게 전쟁이 끝나는 시기에 맞춰 신문들이 줄줄이 생길 수 있었던 배경에는 레지스탕스 세력을 지원했던 드골 임시정부의 법적 뒷받침이 있다. 정부는 노르망디 작전이 펼쳐지기도 전이던 1944년 5월4일을 시작으로 같은 해 6월22일, 9월31일 잇따라 언론 관련 훈령을 내놓았다. 임시정부의 첫 번째 훈령이었다. 아직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였음에도 정부 차원에서 언론 개혁에 나섰던 걸 보면, 나치 치하에서 부역한 언론의 폐해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훈령의 목적은 명확했다. 매판 언론의 복귀를 막고 추락할 대로 추락한 언론 시스템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사 연구자인 동덕여대 이용우 교수는 자신의 책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에서 이들 훈령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북부 ‘점령지역’은 1940년 6월25일 이후, 남부 ‘자유지역’은 독일군의 점령이 전국으로 확대된 1942년 11월11일 이후 각각 15일 이상 계속 발간된 신문들과 1940년 6월25일 이후 창간된 신문들은 무죄가 입증되지 않는 한 모두 더 이상의 발행이 금지되었다.” 저자는 이에 해당되는 신문의 수가 900종에 달했고, 1948년 말까지 총 538곳의 언론사가 기소당했다고 덧붙였다. 나중에 이 훈령은 정식 법률로 제정됐고, 독일 점령기에 발행된 신문의 제호 사용을 금지하는 조항까지 추가되기도 했다.
리옹의 대표 신문 <르프로그레>는 1859년에 창간해 지역 여론을 선도해왔다. 공화주의의 수호자를 자임하며 에밀 졸라나 장 조레스와 같은 진보적 유명 인사들의 글을 싣기도 했다. 다른 신문이 그랬듯 <르프로그레>도 제2차 세계대전을 맞이해 선택의 기로에 섰다. 독일군이 리옹에 침공한 다음날인 1942년 11월12일자 신문을 끝으로 폐간을 결정했다. 이들은 리옹이 해방(1944년 9월3일)되고 닷새 후인 9월8일 재창간호를 냈다. 이들은 쉽지 않은 결정을 통해 자존심도 제호도 지킬 수 있었다.
아예 레지스탕스가 주축이 돼 만든 신문이 지금까지 이어오는 경우도 있다. 프랑스 북부 거점도시인 릴에 본사를 둔 <라부아뒤노르>는 1941년 4월 지하신문으로 창간했다. “우리는 악과 조약을 맺지 않고 적과 협력하지 않는다”고 천명한 이 신문은 1944년 9월5일 지상으로 나와 빛을 보게 됐다. 그러나 자유를 위해 싸운 이들이 받아야 했던 대가는 간단치 않았다. 두 명의 레지스탕스 소속 창립자 중 한 명인 경찰 출신 쥘 누투르가 당국에 잡혀 그로스-로젠 수용소로 끌려가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한 채 사망한 것으로 비롯해 신문의 제작 배포에 참여했던 사람 530여명이 감금과 고문 등의 고통을 받아야 했다. 지역민들은 이들의 수고에 화답하듯 이 신문을 지역의 최고 신문으로 만들어 주었다. <라부아뒤노르>는 현재도 일일 판매부수 20만에 달하는 탄탄한 입지를 갖추고 있다.
해방된 프랑스 정부는 부역 언론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자신이 참여연대 사무처장 시절 쓴 논문 <프랑스의 부역자 처벌>에서 “언론의 부역행위를 주도적으로 수행한 언론인들에게는 사형 등 가혹한 형사적 처벌이 부과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벼운 형사처벌을 받거나 형사처벌의 회초리를 면한 사람들조차 새로운 공화국의 언론에 종사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고 썼다. 논문에 따르면 전쟁 이후 설치된 파리재판소를 통해 처벌받은 최초의 부역자도 언론인이었다. 친독 일간지 <오주르뒤>의 편집국장 조르주 수아레즈는 1944년 10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 총살로 생을 마감했다.
전쟁의 아픔을 교훈 삼아, 정론지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염원을 담아 생겨난 신문이 바로 1944년 12월19일 창간한 <르몽드>였다. 프랑스에도 국제적 권위를 가진 신문 하나쯤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드골 장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러니까 프랑스 언론이 열강의 대표 신문들보다 짧은 역사를 가진 건 결점이라기 보다 영광의 상처쯤 되는 것이다.
전 광주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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