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형우 광주매일신문 기자, 덴마크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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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광주전남기자협회
- 작성일 26-10-13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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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형우 광주매일신문 기자, 덴마크를 가다
풍력의 섬 삼쇠, 숫자 너머 삶을 보다
‘탄소 제로’ 현장서 마주한 평범한 섬마을
설득·참여로 일군 주민 주도 에너지 전환
소박한 일상 속 지속가능한 삶의 답 찾아

입사 1년이 채 되지 않은 시기, 얼떨결에 생애 첫 해외취재 기회가 생겼다.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사업에 신청했던 취재가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엔 설렘과 기대보다는 얼떨떨함이 먼저였다. 장소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북유럽 덴마크.
국내 사전 취재부터 비행기표 예매, 숙소 알아보기, 회계 업무까지 혼자서 해야 할 일들은 산더미였지만 무엇보다 급한 건 취재 루트를 짜고 통역을 구하는 일이었다.
국내외 여행 사이트를 둘러보던 중 한 덴마크 현지 전문가의 웹사이트가 눈에 띄었다. 덴마크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해박한 전문가라는 소개에 무작정 이메일부터 보냈다.
첫 답장은 그리 희망적이진 않았다. “덴마크는 7월부터 공공기관도 ‘방학’ 기간이기에 취재가 어려울 수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래도 나의 딱한 사정을 들은 그는 취재 장소 동행은 물론 처음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에너지아카데미’와 연결까지 해줬다.
국내 취재를 마치고 맞은 7월. 덴마크에 가기 전 머릿속 이미지는 꽤 단순했다. 풍력발전기, 자전거, 친환경, 그리고 코펜하겐의 알록달록한 건물들. 특히 에너지 자립을 이뤄낸 ‘탄소 제로의 섬’ 삼쇠에 도착하면 각종 친환경 시설이 곳곳에 가득할 것이라고 막연히 상상했다.
실제로 가보니 예상은 반쯤 맞고 반쯤 틀렸다.
코펜하겐을 거쳐 다시 육로와 배를 이용해 삼쇠로 향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꽤 긴 여정이었다. 유럽 특유의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건물과 탑을 향하던 내 시선은 기차를 타고 도시를 벗어나면서 점차 낮아졌다.
높은 건물 대신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던 중, 십여대의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한국에서 풍력발전기는 흔히 ‘발전시설’이라는 이름으로 먼저 인식된다. 반면 덴마크에서는 마치 농촌 마을 한편에 있는 오래된 전봇대나 느티나무처럼 그저 풍경의 일부인 듯했다.
삼쇠도 비슷했다. ‘세계적인 에너지 자립섬’이라는 이름과 달리 막상 도착한 곳은 낮은 집과 들판, 한적한 도로가 이어지는 조용한 섬마을이었다.
재생에너지는 관광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물이 아니라 주민들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들어가 있었다. 밭 뒤에서 풍력발전기가 돌아가고, 마을에서는 재생에너지로 난방을 하고 있었다.
매일 수십, 수백명을 실어 나르는, 내가 타고 온 배가 전기로 움직이는 선박이라는 사실도 배에서 만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뒤늦게 알았다. 그만큼 이곳에서 재생에너지는 굳이 눈여겨봐야 할 ‘특별한 시설’이라기보다 이미 생활 속에 들어와 있는 일상의 일부처럼 보였다.
처음 삼쇠를 취재할 때 내가 궁금했던 것은 ‘정말 100% 에너지 자립이 가능한가’였다. 전기는 몇%, 난방은 몇%, 자동차는 얼마나 전기차인지, 그리고 주민들에게 돌아가는 수익은 얼마인지 숫자로 깔끔하게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지에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을수록 숫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누가 처음 이 일을 제안했는지, 주민들은 처음에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서로 다른 이해관계는 어떻게 조율했는지, 수익은 어떻게 돌아갔는지가 더 궁금해졌다.
삼쇠에너지아카데미 역시 처음에는 신재생에너지 기술을 연구하는 기관 정도으로 생각했다. 현지에서 들어보니 기술 못지않게 주민들을 만나고 설득하는 일이 중요했다. 각자가 처한 상황을 파악한 뒤 사업을 설명하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 속에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함께 찾는 과정이었다.
처음부터 모두가 박수를 치며 풍력발전기를 세운 것은 아니었다. 반대도 있었고, 걱정도 있었다.
현지 관계자들은 ‘몇%의 성장, 몇%의 전력 대체’와 같은 성과 예측이나 ‘기후위기 시대’, ‘탄소중립’과 같은 대의명분만을 얘기하지 않았다.
“내일 당장 내 일감이 늘어날까” “매달 내던 난방비는 얼마나 줄어들까” “내가 이 사업에 참여하면 어떤 이익이 있을까”
주민들이 실제로 궁금해하는 것은 이런 문제들이었다. 그 질문에 답하고 사업 결과를 자신의 삶과 연결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지금의 삼쇠를 만들었다.
취재를 마칠 무렵에는 ‘에너지 자립’이라는 말도 처음과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섬에서 쓸 전기를 섬 안에서 생산한다는 의미를 넘어, 지역의 미래를 그 지역 사람들이 얼마나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했다.
취재 이후 남는 시간마다 관광을 다니면서도 곳곳에 있던 삶의 조각들이 전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햇빛이 쩅쨍했지만 바람이 강하게 불어 버틸 수 있던 날에는 왜 이 나라가 풍력발전을 선택했는지 통계를 보지 않아도 몸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슈퍼마켓을 돌아다니며 덴마크 음식과 삼쇠에서 난 것을 찾아 먹어보는 일도 소소한 재미였다. 섬에서 난 열매로 만든 레드커런트 주스를 마시면서 라벨에 쓰인 낯선 덴마크어를 하나씩 찾아보기도 했다.
한 샌드위치 가게 사장님과의 만남도 기억에 남는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그는 “살면서 간 나라 중 한국이 가장 좋았다”고 환하게 웃었다. 본래 코펜하겐에서 살던 그는 도심의 빠르고 바쁜 삶에 피로를 느껴 삼쇠에 왔다고 했다.
작은 레스토랑을 운영하던 그의 얼굴에는 여유가 묻어났다. 이유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삼쇠에는 이렇게 외부에서 찾아와 자신의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게를 나설 때 그가 서비스로 건네 준 과자 한 봉지도 풍력발전기 못지않게 또렷하게 기억난다.
한국으로 돌아와 사진을 정리하니 의외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거창한 관광지가 아니었다.
한적한 삼쇠의 길, 마을 뒤편에서 천천히 돌아가던 풍력발전기, 마트에서 집어 든 낯선 주스 한 병, 그리고 샌드위치 사장님이 서비스로 줬던 과자 한 봉지였다.
출발할 때는 발전량과 설비용량, 주민들의 소득 등과 같은 숫자를 최대한 많이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막상 돌아와 보니 숫자보다 오래 남은 것은 그곳의 사람들이었다.
삼쇠섬이 모든 지역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완벽한 정답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이번 취재를 통해 한 가지는 분명하게 느꼈다. 에너지전환도, 지역을 위한 정책도 결국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글로 정보를 전하고 때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기자의 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덴마크에서 돌아온 뒤에도 삼쇠를 생각하면 풍력발전기보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먼저 떠오른다. 생애 첫 해외취재에서 가져온 가장 오래 남을 기억도 아마 그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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